"버려진 엔진 가져다 車에 끼우듯"…얌체 같은 세균의 생존 전략

중앙일보

입력 2021.11.24 13:22

업데이트 2021.11.24 13:35

물속 미생물과 떠 다니는 헴(heme) 분자의 상상도. 미생물 군집 사이에 보이는 분자 구조 모형은 헴을 나타낸 것으로, 4개의 피롤 고리가 만드는 화학 구조의 중앙에 철 이온(주황색)이 자리하고 있다. [조장천 인하대 교수 제공]

물속 미생물과 떠 다니는 헴(heme) 분자의 상상도. 미생물 군집 사이에 보이는 분자 구조 모형은 헴을 나타낸 것으로, 4개의 피롤 고리가 만드는 화학 구조의 중앙에 철 이온(주황색)이 자리하고 있다. [조장천 인하대 교수 제공]

물에 떠다니는 많은 세균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성분을 직접 만드는 대신 남이 만든 것을 활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엔진 없는 자동차를 만들었다가 주변에 버려진 엔진을 가져다 '재활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살아가고 증식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한 세균의 얌체 같은 생존 전략인 셈이다.

인하대 생명과학과 조장천 교수팀은 24일 국제 저널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게재한 논문에서 "호수에서 플랑크톤으로 살아가는 세균 가운데 상당수가 헴(heme)을 생산하는 유전자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헴 

세포 내 헴 합성 경로. 맨 아래 헴(heme)은 18단계를 거쳐 만들어지는데, 붉은색으로 표시한 화살표는 해당 단계에 간여하는 효소 유전자가 연구 대상 세균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하대 제공]

세포 내 헴 합성 경로. 맨 아래 헴(heme)은 18단계를 거쳐 만들어지는데, 붉은색으로 표시한 화살표는 해당 단계에 간여하는 효소 유전자가 연구 대상 세균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하대 제공]

헴은 포르피린 고리라는 유기화합물에 철 이온이 결합한 것으로, 헴은 다시 다양한 단백질에 편입돼 핵심 기능을 수행한다.
대표적인 것이 적혈구의 헤모글로빈, 근육의 미오글로빈, 세포 호흡에 관여하는 사이토크롬, 활성산소를 제거하는 카탈라아제 등이다.
특히, 헴은 세포의 전자 전달계에서 사이토크롬에 편입돼 전자 운반체 구실을 하기 때문에 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생물에게서는 빠질 수 없는 핵심 성분이다.

지금까지 인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이나 동물의 장(腸)에 서식하는 일부 유산균이 헴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물속에서 독립생활을 하는 세균들은 헴을 독자적으로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인하대 연구팀이 강원도 소양호에서 분리한 세균을 분석한 이번 연구 결과는 이러한 통념을 깨는 것이다.
연구팀은 2개 균주에서 헴을 만드는 유전자가 결핍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그중 하나는 비타민인 리보플래빈도 만들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헴 합성 유전자 없는 세균 많아

인하대 연구팀이 세균을 분리한 원도 인제군 소양호. 중앙포토

인하대 연구팀이 세균을 분리한 원도 인제군 소양호. 중앙포토

제1 저자로 연구에 참여한 김수현 박사는 "헴 합성 능력이 없는 이 세균에게 헴을 제공했더니 잘 자랐다"며 "다른 생명체가 합성한 헴에 무임승차하며 살아간다는 생존의 비밀을 실험으로 입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또 유전자 데이터베이스(DB)에 등록된 약 2만5000여 개의 세균 유전체를 정밀히 조사한 결과, 많은 미생물이 헴을 합성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양 고세균과 해양 방선균을 비롯한 물 환경에서 살아가는 많은 미배양 미생물의 유전체에 헴 합성 유전자가 결핍돼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연구팀의 강일남 인하대 연구중점교수는 "세균들이 헴 합성과 관련된 유전자를 버리고 다른 생물이 만든 물질을 섭취하는 쪽으로 진화한 것은 '검은 여왕 가설'을 지지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헴 유전자 결핍 세균을 연구한 인하대 생명과학과 연구팀. 왼쪽부터 김수현 박사후연구원, 강일남 연구중점교수, 조장천 교수 [인하대 제공]

헴 유전자 결핍 세균을 연구한 인하대 생명과학과 연구팀. 왼쪽부터 김수현 박사후연구원, 강일남 연구중점교수, 조장천 교수 [인하대 제공]

검은 여왕 가설(Black Queen Hypothesis)은 미생물이 자신의 유전체를 축소해 중요한 유전자를 버리는 대신 주위 환경에서 필요한 물질을 얻는다는 진화 이론이다.
이 이론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카드게임인 ‘하트’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게임에서는 검은 여왕(블랙 스페이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불리하므로 게임에서 승리하려면 검은 여왕을 버려야 한다.
주변 환경에 필요한 물질이 있어 이용 가능하다면 미생물은 생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 물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전자(검은 여왕 카드)를 버리는 쪽으로 진화한다는 가설이다.

검은 여왕 가설 뒷받침하는 사례

스페이드 퀸.

스페이드 퀸.

실제로 세포 내에서 헴을 합성하려면 8~11단계에 이르는 복잡한 생화학적 경로를 거쳐야 하고, 이 화학반응에 간여하는 단백질들을 구성하려면 총 5800~7200개의 아미노산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원에 제한된 자연환경에서 서식하는 미생물의 경우 이런 단백질들을 만들고 헴을 합성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외부에서 헴을 흡수해 '재활용' 또는 '재사용'하는 것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다.

아울러 헴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활성산소의 독성 피해까지 줄일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문제는 자연계에 헴이 충분히 있느냐 하는 것. 실제 바닷물에는 헴 농도가 미생물들의 성장을 지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존재하는 것이 기존 연구에서 확인됐다.
호수에서는 헴 농도가 낮은 편이었는데, 대신 엽록소를 헴으로 재활용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엽록소를 구성하는 포르피린에는 마그네슘 이온이 들어있는데, 마그네슘을 철 이온으로 교체한다면 헴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99% 세균 배양하는 '열쇠' 될 수도

배양접시에 자란 세균 군체(colony). 현미경에서 관찰되는 세균의 99% 는 실험실 내에서 배양하지 못하고 있다.

배양접시에 자란 세균 군체(colony). 현미경에서 관찰되는 세균의 99% 는 실험실 내에서 배양하지 못하고 있다.

연구팀 조장천 교수는 "실험실에서 배양이 안 되는 이른바 '암흑 미생물(Microbial Dark Matter)'이 헴을 합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이번 연구의 주요 성과"라며 "앞으로 헴을 제공해 암흑 미생물을 배양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암흑 미생물은 자연계 미생물 중 99% 이상을 차지하는 미생물로 아직 실험실에서 배양이 되지 않은 미생물을 말한다. 이들이 자라는 데 필요한 배양 조건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조 교수는 "다른 미생물이 만든 헴을 활용해 '무임승차'하는 얌체 세균의 진화 전략에 대한 이해가 암흑 미생물을 배양하는 실마리가 된 셈이고, 이를 통해 인류가 유용한 미생물을 다양하게 확보할 가능성도 커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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