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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앞장선 86…‘반미·반파쇼’ 서사로 기득권 정점 [전두환 1931~20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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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7년 4월 13일 저녁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모습. 이 특별 담화는 당시 전국 TVㆍ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중앙포토.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7년 4월 13일 저녁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모습. 이 특별 담화는 당시 전국 TVㆍ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중앙포토.

“현행 헌법에 따라 임기만료와 더불어 내년 2월 25일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특별 담화, 즉 ‘4·13 호헌(護憲) 조치’의 내용이다. 차기 대통령도 ‘체육관 선거’로 뽑겠다는 말에 대한민국은 일순간 ‘호헌 대 개헌’ 구도로 갈라졌다. 야당도 반대는 했지만, 투쟁 전면에 나선 건 대학생들이었다. 서울지역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5월 8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서대협)을 출범시키고, 전두환 정권에 맞선 가두 투쟁을 준비했다. 이른바 ‘86세대 서사’의 시작이었다.

서대협 지도부가 정한 디데이(D-Day)는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였다. 행사를 주최한 건 재야 시민단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이었지만, 가두시위를 도맡은 건 대학생들이었다. 각 대학 총학생회는 6월 1일부터 대학별로 삭발, 단식, 혈서투쟁을 시작했고, 전날인 6월 9일엔 각 대학별 결의 대회를 열었다. 학생 참여를 최대로 끌어내기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이었다.

연세대 결의 대회에선 이 학교 2학년생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 소식이 퍼져 나가서였을까. 다음날 6·10 총궐기에 참여한 시위 인원은 서울에서만 5만명, 전국 22개 지역에서 약 24만명에 달했다. 마침 이날은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최고위원이 새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날이기도 했다.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고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모습이 담긴 중앙일보 1987년 6월 11일자 6면 기사. 이후 '호헌 철폐' 시위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게 됐다. 중앙포토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을 맞고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모습이 담긴 중앙일보 1987년 6월 11일자 6면 기사. 이후 '호헌 철폐' 시위에는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게 됐다. 중앙포토

이후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6월 15일엔 전국 규모 시위가 다시 벌어졌고,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엔 전국 150만명이 참가했고, 1487명이 연행됐다.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엔 전국 180만명이 참여했다. 경찰서 2곳, 파출소 29곳, 민정당 지구당사 4곳이 투석과 화염병 투척으로 파괴되거나 불에 타는 등 거친 시위가 벌어졌다. 사흘 뒤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호헌 포기’라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전대협동우회가 1994년 펴낸 『불패의 신화 - 전대협 이야기 6년사』는 6월 항쟁에 대해 “우연한 사건에 의해 갑자기 터져 나온 투쟁이 아니라, 4월부터 차근차근 준비된 투쟁이었다. 세부적인 프로그램은 6월 10일 총궐기에 맞추어져 있었고 그 이후의 진행계획은 하나의 투쟁이 끝날 때마다 새로 수립되었다”고 기록했다.  이처럼 ‘86세대 학생운동’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준비를 통해 군사정권 종식에 앞장섰다.

반제·자주·통일 구호로 민주화운동 선봉에 선 ‘86세대’

‘86세대 학생운동’은 80년대 초반부터 전두환 신군부 집권 과정과 5·18민주화운동 학살 과정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데 주력했다. 다만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통치 탓에 80년대 중반까지는 구속과 죽음까지 각오한 소규모 ‘선도 투쟁’ 위주였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1982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1985년),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 분신(1986년 4월) 등이 대표적이다.

애학투련 발족식 이후 건국대에서 농성을 벌이던 대학생들이 4일만에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중앙포토

애학투련 발족식 이후 건국대에서 농성을 벌이던 대학생들이 4일만에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중앙포토

대규모 학생 집회가 처음 시도된 건 1986년부터였다. 이른바 ‘건국대 사태’로 알려진 1986년 10월 28일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이 유명하다. 결말은 처참한 탄압이었다. 경찰은 진압 작전을 피해 건물에서 농성한 학생 2000여명을 3박 4일 동안 고립시킨 뒤 전원 연행해 1290명을 구속하고, ‘공산혁명분자 건국대점거난동사건’이라 이름 붙였다. “도대체 남녘 땅 민중에게 반공 이데올로기는 무엇입니까. 쪽발이 양키놈을 더 좋아하고” 같은 과격한 대자보가 논란이 되면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데도 실패했다.

특히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NL(민족해방)계가 내세운 반제국주의와 자주·통일이라는 이념적 가치는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6월 항쟁 직후 출범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범선언문에도 NL계의 노선이 충실히 반영돼 있다. 전대협은 선언문에서 “우리는 진정 역사적 전통이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모습으로 조국의 자주화와 민주화, 민족통일을 위해 선도적으로 투쟁해왔다. 이제 우리가 이루려는 청년학도의 전국적 대동단결은 저 더러운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과 미 제국주의자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쓸어버릴 엄청난 역사의 급류로 돌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학생운동은 군사정권의 최루탄과 군홧발을 돌파하는 데엔 성공했으나, 기성 정치를 바꾸는 데엔 실패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로 야권이 분열되자, 학생운동도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후보 단일화’로 쪼개졌다. 이후 전대협은 1989년 한국외대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씨를 정부 허가 없이 북한에서 열린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파견하는 등 급진적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다 1992년 스스로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고 다음 세대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DJ가 영입한 ‘86세대’…지금은 민주당 주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던 ‘86세대’가 다시 이름을 떨친 건 1999년부터였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1984년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6·3 재선거 인천 강화·계양 갑에 출마한 것을 시작으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와 한나라당 양당은 ‘젊은 피 수혈’을 명분으로 삼아 경쟁적으로 80년대 학번 학생운동권 출신을 영입했다.

제16대 총선 다음 달이던 2000년 5월 17일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사진 가운데)와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민석 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386세대' 당선자들이 광주시 망월동 5.18묘역에서 합동참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제16대 총선 다음 달이던 2000년 5월 17일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사진 가운데)와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민석 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386세대' 당선자들이 광주시 망월동 5.18묘역에서 합동참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86세대’는 1999년 10월  ‘전후세대 중심의 정치시민운동’이라는 기치를 걸고 ‘제3의 힘’이란 단체를 출범시켰다. 전대협 의장 출신 이인영 통일부 장관(1기), 오영식 전 민주당 의원(2기),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3기)을 포함, 송 대표,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198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우상호 민주당 의원(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 등이 주요 멤버다. 이들은 2000~2004년 총선을 거치며 국회에 입성해, 현재는 여권의 핵심이 됐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전대협이 전면에 나선 첫 정권”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초대 대통령 비서실에서 비서실장(임종석), 1부속실장(송인배), 2부속실장(유송화), 국정상황실장(윤건영) 등이 전대협 출신이었다. 문 대통령 취임 초기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김태년 의원은 전대협 부의장 출신이고, 당시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았던 박홍근 의원은 6기 전대협 의장 대행을 지냈다. 김성환 현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와 최종윤·박완주·홍익표·기동민·최인호 의원도 전대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2017년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진과 오찬을 함께한 뒤 커피를 들고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 조국 전 법무장관(사진 맨 왼쪽)과 권혁기 전 춘추관장(왼쪽에서 두 번째), 이정도 총무비서관(왼쪽에서 네 번째), 송인배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오른쪽에서 세 번째), 윤영찬 민주당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사진 맨 오른쪽) 등 초대 청와대 참모진 상당수는 '86세대'였다. 중앙포토

2017년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진과 오찬을 함께한 뒤 커피를 들고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 조국 전 법무장관(사진 맨 왼쪽)과 권혁기 전 춘추관장(왼쪽에서 두 번째), 이정도 총무비서관(왼쪽에서 네 번째), 송인배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오른쪽에서 세 번째), 윤영찬 민주당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사진 맨 오른쪽) 등 초대 청와대 참모진 상당수는 '86세대'였다. 중앙포토

특히 지난 4년 간 외교·안보를 비롯한 문재인 정부의 각종 정책엔 ‘86세대’의 색채가 강하게 녹아 있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2019년과 2021년 페이스북에 올린 ‘죽창가’는 1980년대 대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민중가요다.

이와 관련 신율(정치학) 명지대학교 교수는 “86세대를 정치권에 영입한 건 김대중 전 대통령이지만, 이들은 실용과 개혁을 함께 추구했던 DJ 정신과 달리 이념적 성향이 강하다”며 “86세대가 주류로 자리매김하면서 현재의 민주당은 과거와 완전히 다른 정당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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