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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안경덕 독대한 USTR 대표…‘中 노동문제 압박’ 공조 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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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과 캐서리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19일 만나 국제노동 현안에 대해 회담했다. 이날 만남은 타이 대표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고용노동부 제공]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과 캐서리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19일 만나 국제노동 현안에 대해 회담했다. 이날 만남은 타이 대표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고용노동부 제공]

미국이 국제 기준과 동떨어진 중국의 노동 관행에 대해 한국이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하도록 압박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기술 탈취나 중국 내 인권 문제를 제기한 데 이어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적인 공조 체제를 구축하고, 그 첫 번째 공조국으로 한국을 택한 셈이다.

18일 방한한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장관급)가 19일 안경덕 고용노동부 장관을 만나 이런 뜻을 전한 것으로 복수의 소식통이 전했다.
USTR 대표의 고용부 장관 독대, 처음있는 이례적 일
USTR 대표가 고용부를 특정해 장관과 협의를 하는 것도 이례적인데다 이번 만남이 타이 대표가 요청해서 이뤄진 만남이어서 주목을 끈다. 단순한 한·미 간의 통상 교섭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USTR 대표의 방한은 2011년 이후 10년 만이다. 고용부 장관과의 공식 면담은 처음이다.

정부는 USTR 대표와 고용부 장관 간의 이번 회담에 대해 "양국이 맺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노동장(章) 이행상황과 주요 현안, 무역자유화 확산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충분히 보호하기 위한 협력사업 추진방안을 논의한다"며 원론적 입장을 설명했다.

USTR, 제안서 곳곳에 중국 겨냥한 압박 동참 촉구
하지만 USTR 측이 제안한 내용이 예사롭지 않다. 단순히 한·미 FTA에 명시된 노동장에 대한 논의를 하자고 나선 것이 아니어서다. 타이 대표는 ▶한·미 FTA 노동장 협력 메커니즘을 활용한 협력방안 ▶제3국에서의 노동권 증진을 위한 양자 협력 ▶국제공급망에서의 강제노동과 착취적 관행 근절을 위한 양자 협력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타이 대표는 바이든 정부의 '노동자 중심 통상정책'을 설명했다.

제안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3국'과 '국제공급망' '강제노동과 착취적 관행' '양국 협력' 같은 단어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이날 미국 언론에 배포한 자체 보도자료에서도 이를 강조했다. 타이 대표가 강조한 국제공급망이나 제3국은 다분히 '세계의 공장'으로 일컬어지는 중국을 특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 관계자는 "직접 중국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중국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맞다"고 말했다.

기술탈취, 인권에 이어 노동문제에 대한 중국 압박 국제공조체제
이는 미국이 글로벌 시장에서의 기술 탈취, 중국 위구르 신장 지구 등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와 같은 문제 제기에 이어 노동문제까지 국제기준을 기치로 중국을 압박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중국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통한 제품 가격 낮추기를 불공정 무역 행위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USTR의 제안은 노동문제와 관련한 국제적인 압박 공조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이고, 이에 대한 한국의 동의와 압박 대열 동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타이 대표는 지난달 "중국의 국가 중심적이고 비시장적인 무역 관행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계속하고 있다"며 "이런 광범위한 정책 문제를 중국 정부에 제기할 것"이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방한에 앞서 타이 대표는 일본을 방문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일 통상협의체'를 발족하기로 합의했다.

USTR이 언급한 한·미 FTA 상의 '노동장 협력 메커니즘'도 쉽게 흘릴 사안이 아니다.
정부 "무역제재로까지는 번지지 않을 것"…경제·외교 부담은 분명
한·미 FTA 노동장에는 '국제노동기구(ILO) 기본권 선언 상 노동기본권에 대한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조항 이외에 한·중 간의 무역을 노동문제로 제어할 수 있도록 확대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양국 간 무역·투자에 미치는 방식으로 노동법 적용 예외 금지'를 명시한 조항이다. 미국 입장에선 한국이 노동 착취에 기반해 생산된 중국산 원자재나 부품 등을 수입해 만든 제품이 가격 인하와 같은 효과를 내고, 이는 비시장적 무역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불공정 무역으로 한국을 제재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이런 상황까지 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미국이 통상 분야 수장까지 보내 요청한 이상 한국으로선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섣불리 노동문제를 이유로 대(對) 중국 압박에 나서기도 어렵다. 중국과의 무역 분쟁이 벌어지면 요소수 사태에서 보듯 중국의 역공이 취해질 수 있고, 한국은 이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노동문제가 또하나의 경제·외교 악재로 등장한 셈이다. 이와 관련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의 의도는 짐작이 가지만 우리를 지렛대 삼아 (중국을) 압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라며 "추후 논의를 계속하면서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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