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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다녀와야 남자지"…2030 분노 부른 병무청 5분 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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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2021년에 ‘군대 갔다 와야 남자라고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을 정부 기관 홍보영상에서 듣는 게 정상인가요?”

‘성별 선입견 조장’ 논란이 일었던 병무청의 홍보영상에 대한 한 2030세대의 반응이다. 병무청은 지난 5일 공식 유튜브 채널에 ‘친구에게 듣는 군 생활 이야기’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20대 청년 3명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군 생활의 보람과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약 5분 분량의 영상이다.

또래끼리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설정으로 친근감을 주려는 게 병무청의 의도였으나, 정작 2030의 반응은 냉담을 넘어 분노로 이어졌다. ‘국가가 나서서 선입견을 조장하는 것이냐’는 불만이 쇄도하면서다.

지난 5일 올라온 병무청 홍보영상. 유튜브 '대한민국 병무청' 캡처

지난 5일 올라온 병무청 홍보영상. 유튜브 '대한민국 병무청' 캡처

사업 홍보하려다 ‘갈라치기’ 논란 빚은 병무청

병무청은 ‘슈퍼힘찬이 프로젝트’를 홍보하기 위해 이 영상을 제작했다. 병역 판정 검사에서 시력·체중 등의 이유로 4·5급 판정을 받은 사람이 현역 입대를 원할 경우 병무청이 치료 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영상 속 출연자의 대사가 문제가 됐다. 몸무게 때문에 4급 보충역(공익) 판정을 받았다가 치료 후 현역 입대했다는 설정의 출연자는 “군대라도 다녀와야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남자라고 얘기하고 다니지”라고 말했다. 영상이 공개된 직후 ‘편법을 쓴 것도 아닌데 아파서 군대 못 간 사람은 남자가 아니냐’, ‘현역과 공익을 갈라치기 하려는 것이냐’는 반응이 온라인에서 빗발쳤다.

백내장 수술 때문에 공익으로 군 복무를 했다는 이모(27)씨는 “공익으로 군대를 다녀왔다고 하면 미심쩍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남아 있다. 영상을 보면서 정부 기관이 그런 선입견을 가중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2020년도 새해 첫 병역판정검사가 실시된 3일 오전 대구 동구 신서동 대구경북지방병무청. 뉴시스

2020년도 새해 첫 병역판정검사가 실시된 3일 오전 대구 동구 신서동 대구경북지방병무청. 뉴시스

‘요리하는 여성’…성별 고정관념도 도마 위에

일부 장면은 성별 고정관념을 내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영상 속 출연자가 “우리 가족, 우리나라를 지키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화면 여백에 음식을 내오는 여성의 모습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가족을 연상시키는 다른 이미지가 많은데 굳이 요리하는 여성의 모습을 넣은 건 병무청이 ‘집안일은 여성의 몫’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대학생 지모(24)씨는 “공공기관 홍보 자료에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아무 문제의식 없이 나타난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여성 입장에선 같은 문제가 반복되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했다. 지난 1월엔 서울시가 운영하는 임신 정보 사이트에 임신 말기 여성에게 남편 속옷을 정리하는 등 ‘집안일을 해두라’고 안내하는 내용이 논란 끝에 삭제되기도 했다.

병무청은 진화에 나섰다. 병무청 관계자는 14일 “본래 취지와 달리 논란이 된 것에 대해 유감”이라며 “앞으로 국민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병무 행정을 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영상은 이날 오후부터 비공개 처리됐다.

“정부 기관의 시대착오적 홍보”

지난 1월 논란이 된 직후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사이트. 서울시 홈페이지 캡처

지난 1월 논란이 된 직후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사이트. 서울시 홈페이지 캡처

전문가들은 병역 문제 등 젠더 이슈에 대한 정부 기관의 이해 부족을 지적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선 후보들이 2030을 공략하려고 적극적으로 모병제 공약을 내세우는 시기에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대서 현역 병사를 늘리려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특히 젠더 이슈가 예민한 요즘 이런 표현은 갈등에 불을 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 교수는 이어 “정부 기관의 홍보물에서 이런 성차별적인 요소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검수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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