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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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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민주당에 등 돌리는 20·30세대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대한민국은 과거의 대한민국이 아니다”고 했다. 코로나 방역과 경제회복에서 세계의 모범이 되었고, 세계 10위 경제 대국, 수출 6위 무역 강국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1인당 국민소득도 처음으로 G7을 추월했다며 자랑했다. 그 이면의 그늘은 간단하게 스치듯 넘어갔다. “세계에서 저출산이 가장 심각하고, 노인빈곤율·자살률은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문제는 “여전히 최고의 민생문제이면서 개혁 과제”라고 딱 한 줄 언급했다.

하지만 지난 4년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는 넓고 깊다. 우리가 최근 한 달간 목도한 장면들만 더듬어 봐도 그러하다. 문 대통령의 취임사 제목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였다. “지금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취임사와 달리 불편하고 뒤틀린 모습이다. 우리 사회가 망가지고 병들어 가는 현장들이다.

부동산·조국 사태와 2030의 반란
무능과 위선이 진보 진영에 치명상
민주당 처음 경험하는 뼈아픈 재앙
정치적 재생산 기반 무너질지 몰라

#두 쪽으로 쫙 나눠진 좌·우 진영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지난달 30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서울 올림픽공원. 가장 장엄한 국가장인데도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있었다. 뉴스1은 현장 사진을 전송하면서 ‘누군가의 빈자리’란 제목을 달았다. 헌법재판소장,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의 의자가 숭숭 비어 썰렁했다. 사방 빈자리 속에 꼿꼿이 앉은 김부겸 국무총리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였다.

영결식은 코로나 거리두기와 ‘검소한 장례’를 주문한 고인의 뜻에 따라 참석자를 50명으로 한정했다. 대부분 서울대 병원 빈소에 조문했던 인사들이다. 하지만 민주당 광주 의원들과 진보 지지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분위기가 급변했다. 장시간 언론 카메라에 노출되는 영결식 참석을 불편해하는 조짐이 번지기 시작했다. 영결식 당일 불참자가 쏟아지자 일부 유족은 “숭숭 뚫린 자리가 보기 흉하니 빈 의자들을 치우고 간격을 좁혀 앉자”고 했다. 하지만 대다수 유족과 국가장례위원회에는 “혹시 나중에라도 올지 모른다”거나 “이것도 역사의 현장이니 빈자리는 빈자리대로 그냥 두자”는 의견이 더 많았다.

진보 진영 내부에선 물밑에서 끔찍한 몸살을 앓았다. 실제로 영결식에서 추모 기도를 올렸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이홍정 목사는 내부 비판에 사퇴 위기까지 몰렸다. 이 목사가 “영결식 참석은 5·18 광주의 마음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지 못한 중대한 잘못”이라고 공식 사죄했을 정도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보수·진보로 완전히 쪼개진 것이다. 총리실 관계자는 “국가장으로 결정할 때는 별말이 없었다. 다들 장례위원인 데다 빈소 조문까지 해 놓고 마지막 영결식장에 불참자가 많아 안타까웠다”고 했다. 일부 초청 대상자는 “다른 인사를 대신 참석시키면 안 되겠느냐”고 떠보았다가 그마저도 없던 일로 돌렸다. 국가장을 추진한 정부 측과 유족들만 두 쪽으로 쪼개진 영결식에 난감해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 “그나마 노 전 대통령이 먼저 돌아가셔서 국가장이라도 가능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먼저 타계했다면 국가장은커녕 장례식을 놓고 온 나라가 두 쪽 났을 게 분명하다.”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광경이다.

#성남시의 정치적 집단 린치?

대장동 사태의 속살을 보려면 지방 신문을 잘 살펴야 한다. 지난 8월 31일 ‘이재명 후보님, 화천대유 자산관리는 누구 것입니까’를 단독 보도한 경기경제신문이 대표적이다. 지난 1일 성남 도시개발공사 윤정수 사장의 폭탄선언도 마찬가지다. 홈페이지에 “대장동 사업은 공사 직원들의 업무상 배임 행위와 민간사업자 측이 이런 행위에 적극 가담한 공동정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는 보고서를 올린 것이다.

윤 사장은 3년 임기를 가까스로 마치고 지난 6일 퇴임했다. 폭탄선언의 배경이 궁금해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 간신히 짧은 통화가 이뤄졌다. 그는 “언론에 더 이상 말할 입장이 아니다”며 입을 닫았다. “궁금한 게 있다면 지난 8월 분당신문과 성남일보의 기사를 찾아보라”며 답변을 대신했다. 네이버에도 잘 검색이 되지 않는 작은 지방신문이다.

이 기사들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성남시의회는 윤 사장 해임촉구 결의안을 의결했다. 재석 의원 34명 중 27명이나 찬성했다. 같은 해 12월 은수미 성남 시장은 그를 해임했다. 윤 사장은 곧바로 가처분 신청을 제기해 법원에서 인용됐으며, 1심에서 “해임은 은 시장의 재량권 남용으로 위법하다”는 승소를 끌어냈다. 완승이었다.

이 지방지 기사들은 해임 과정에서의 정치적 의구심과 표적 감사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인터뷰에서 윤 사장은 “시 의회 의원들의 각종 청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그런 정치적 배경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다”며 말을 아꼈다. 지방지 보도들에 따르면 해임 사유의 하나였던 공사 직원의 근무시간 중 비트코인 채굴은 그 이전 감사에서 이미 적발된 사안이었고, 여직원에게 신체 접촉을 했다는 음해성 ‘미투’는 정작 해당 여성직원이 그런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점심시간을 위반했다는 혐의도 카드 결제 내역을 보면 대부분 1시 5분, 1시 10분 정도였다. 한마디로 억지로 꿰맞추는 표적 감사였다는 인상을 풍긴다.

재판부는 “임직원의 개인적 일탈 행위의 책임을 물어 공사 사장을 해임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변호인들도 법정 공방에서 “성남시의 논리대로라면 공무원들의 성매매, 성희롱, 음주 운전 등의 비위가 적발된 성남시장부터 벌써 해임돼야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윤 사장에 대한 전방위적 압박은 대장동 보고서 공개 전후 최고조에 달했다. 보고서 공개 4분 전에 은 성남시장의 “공개에 신중을 기하라”는 공문이 도착했다. 초 고강도 최후통첩이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윤 사장이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올리자 직접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나섰다. “해임됐다가 복귀한 ‘그 분’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하다”며 메시지 대신 메신저를 깔아뭉갰다. 대장동 파문을 덮기 위한 안간힘이 묻어난다. 되짚어 보면 지난 1년간 사방에서 윤 사장을 향한 정치적 집단 린치가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바로 옆 성남시에서….

#5년 만에 뒤집어진 진보·보수

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는 대목이었을 것이다. 모두 감격하며 큰 기대를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더 이상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조국 사태 이후 공정이라는 낱말이 사라졌으며, 부동산 재앙 이후 평등과 정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어색해하는 느낌이다. 스스로 머쓱했을 것이고, 청와대 참모들도 “더 큰 역풍을 부를 수 있다”며 만류했다고 한다.

오히려 대비되는 장면이 지난달 11일 부산에서 열린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지지모임이었다. 보수 지지자들은 “문 정부에선 기회가 평등하지 않았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았으며 결과 또한 정의롭지 못했다”며 “윤 후보만이 ‘기회가 평등한 나라, 과정이 공정한 나라, 결과가 정의로운 나라’로 이끌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불과 5년 만에 입장이 정반대로 뒤바뀌었다. 평등·공정·정의의 상표권이 좌파에서 우파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장면이다.

아찔한 속도로 뒤바뀐 것 중의 하나는 20·30세대의 정치 성향이다. 민주당의 핵심 인사는 이렇게 한숨을 쉬었다. “코로나19로만 병 든 게 아니다. 대장동 사태도 나라가 병든 한 단면이다. 전통적으로 ‘부동산 투기=악(惡)’은 진보의 대표상품이었다. 그런데 문 정부에서 화천대유 등 비생산적인 부동산이 변호사·회계사 등 최고급 인력을 빨아들인 블랙홀이 됐다. 20·30세대의 좌절과 분노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이들을 어떻게 설득시킬지 걱정이다.”

윤석열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398 후보(20대 3%, 30대의 9%, 40대 8% 지지율)’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한 자릿수 지지율이란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힘 후보로 확정된 이후에는 양자대결에서 20대 지지율이 41.8%로 이재명 후보(23.3%)를 압도하고 있다(리얼미터).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서는 18~29세의 윤 후보 지지율(34.8%)이 이 후보(14.7%)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냉정하게 보면 윤 후보 인기가 급등했다기보다 청년층이 철저하게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는 의미다.

해방 이후 20·30세대는 줄곧 진보 쪽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었다. 하지만 부동산 지옥과 조국 사태가 이들로 하여금 민주당에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굳어지면 진보 진영의 정치적 재생산 기반이 무너질지 모른다. 20·30세대의 반란은 민주당이 처음 경험하는 뼈아픈 재앙이다. 무능과 위선이 좌파 진영에 치명상을 입히고 있다는 게 빈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