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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빚잔치 선거는 없었다…누가 돼도 국가채무 눈덩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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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대통령선거 대결 구도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로 좁혀지면서 경제공약 경쟁에도 불이 붙었다. 그런데 짜임새 있는 정책 공방은 사라지고 ‘누가 나랏돈을 더 많이 퍼주나’로 비화했다. 유례없는 빚잔치 대선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왼쪽),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왼쪽),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뉴스1

9일 민주당은 6차 재난지원금을 공식화했다. ‘전국민 위드코로나 방역지원금’이란 명칭으로 내년 1월 지급한다는 청사진도 내놨다. 이 후보가 “위로와 보상 차원에서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지난달 29일)고 발언한 지 불과 10여 일만이다.

이날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소요되는 재원은 올해 초과 세수분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납부 유예해 내년 세입을 늘려서 충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지원금의 구체적 지급 규모ㆍ시기ㆍ재원ㆍ절차 등에 대한 논의가 매끄럽게 이뤄질 수 있도록 여야정 협의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초과 세수를 내년 본예산에 수정ㆍ반영하는 방법이 국가재정법에 막혀 여의치 않자 민주당은 세금 납부 유예란 초유의 우회로를 들고 나왔다.

당내에서 논의되는 금액은 1인당 20만~25만원 선이다. 지난 5차 지원금 수준으로 1인당 최대 25만원씩 전 국민(지난달 기준 주민등록인구 5166만명)에게 준다고 가정하면 단순 지급액만 12조9000억원에 이른다. 여기에 행정 비용까지 더하면 13조원은 너끈히 드는 대형 사업이다. 올해분 생계ㆍ의료ㆍ주거ㆍ교육급여 등 7대 기초생활보장급여 예산 총액(16조4000억원)에 버금가는 규모다.

이 후보가 내세운 대책 중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당장 내년 10조원대에서 많게는 수십조원 예산을 추가해야 가능한 지역화폐 예산 증액, 소상공인 손실보상금 확대가 있다. 이 후보의 대표 공약으로 꼽히는 보편ㆍ청년기본소득은 말할 것도 없다. 이재명표 기본소득 공약을 실현하려면 첫해 18조원으로 시작해 임기 마지막 해 59조원을 투입해야 한다. 차기 정부 복지 예산 4분의 1을 기본소득에 쏟아야 하는 실정이다.

대선후보별 주요 경제 공약.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대선후보별 주요 경제 공약.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선별 지원’을 강조하는 윤석열 후보도 예산 퍼주기 공약이란 점에서 사실 다를 게 없다. 윤 후보는 자영업 피해 전액 보상을 내걸었다. 여기에 50조원 예산을 투입하겠다고도 했다.

윤 후보는 양도소득세와 종합부동산세 완화도 공약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주택을 사고팔고(거래세) 보유하는(보유세) 모든 과정의 세금을 올려놓은 게 부동산 정책 패착이란 비판과 함께다. 감세는 현금 지원 못지않게 돈이 많이 드는 정책이다. 받기로 한 세금을 덜 받는 만큼 재정에 구멍이 날 수밖에 없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두 후보는 서로의 공약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민주당이 과세 유예를 통해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려는 걸 두고 이날 윤 후보는 페이스북에 “국가재정은 정치자금이 아니다”란 글을 올렸다. 전날 이 후보 역시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 우롱, 던지고 보는 식 포퓰리즘”이라고 윤 후보의 50조원 자영업 손실보상 공약을 꼬집었다.

서로에 대한 비난글은 사실 두 후보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내용이다. 전 국민 대상이냐, 자영업자를 타깃으로 한 선별 지원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두 후보 모두 수십조원 예산 퍼주기 공약이란 점에서 다를 게 없다.

이를 방어해야 할 정부는 무력한 모습이다.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도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손실보상까지 5차례 거쳐서(기존 재난지원금을) 지원해왔던 내용들이 최대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금년도엔 집중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추가 재난지원금 논의에 부정적이란 기존 입장만 되풀이했다. 김부겸 국무총리와 홍 부총리의 거듭된 반대에도 상관없이 이 후보와 민주당은 재난지원금 밀어붙이기에 들어갔다.

과거 대선 때도 ▶행정수도 이전(노무현 후보) ▶4대강 개발사업(이명박 후보) ▶무상보육과 반값 등록금(박근혜 후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문재인 후보) 같이 대규모 재정 투자가 필요한 공약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번처럼 ‘묻지마’ 현금 살포 약속이 넘쳐나는 때는 없었다.

김원식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백신ㆍ치료제 공급과 맞물려 대부분 국가가 재정 정상화와 나서고 있는데 한국에서만 유독 경기 흐름에 역행하는 선거 포퓰리즘 정책이 난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채무 전망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기획재정부]

국가채무 전망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기획재정부]

대선후보 공약을 전혀 반영하지 않더라도 내년도 통합재정수지(총수입-총지출)는 55조6000억원 적자다. 기재부가 작성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적자는 2023년 64조5000억원, 2024년 69조4000억원, 2025년 72조6000억원으로 뛰어오른다. 국가채무는 더 심각하다. 내년 1068조3000억원으로 처음 1000조원을 돌파한 뒤 불과 3년만인 2025년이면 1408조5000억원으로 치솟는다. 양당 대선후보의 퍼주기 공약은 이런 부채 시계를 더 빨리 돌아가게 할 뿐이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선거 전 예산 보고서(Pre-election budget report)’ 도입을 제안했다. 호주, 유럽 등 주요 선진국에서 법제화해 시행하고 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도 권고하는 제도다. 선거를 앞두고 주요 예산 정책, 재정 현황을 면밀히 분석ㆍ전망하는 내용이다. 선거 과정에서 토론의 재료도 되고 예산 낭비성 공약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양 교수는 “정부 예산 항목 중 특정 후보에 유리한 부분이 없는지 전문가 검토를 통해 검증하고, 중립의 의무가 있는 정부가 선거 후 법적 다툼에 휘말릴 위험도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양 교수는 “한국의 재정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악화하고 있는 데다, 대외 경제 환경도 금리 인상기로 접어들어 4~5년 전과 전혀 다르다”며 “선거 때마다 반복될 재정 퍼주기를 막기 위한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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