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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교과서 밖으로 나가라, 교과서를 새로 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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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선도국가로 가는 길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선도국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적 임무를 달성할 수 있는 핵심적인 전략기술을 보유하는 것과 혁신적 미래기술의 싹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먼저 국가적 전략기술은 최근 누리호 발사를 통해 얻게 된 추진체 기술이 좋은 사례다. 이외에도 감염병 관련이나 통신망 보안 관련 기술처럼 국가의 존립과 국민의 삶을 좌우할 핵심적인 기술이면서 소수 국가만이 보유한 전략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을 때 기술 선도국가라 할 수 있다. 이런 국가적 임무를 충족하는 기술을 얻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따라 대규모 공적투자를 해야 한다. 문제가 복잡할 뿐 아니라 여러 기술이 조합되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백신 60년 전 연구에 뿌리
과학기술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
기존지식 허물며 늘 새롭게 쓰여
장기적·안정적 지원이 필수조건

선도국가의 또 다른 모습은 불확실하지만 미래에 하나의 분야로서 자리 잡게 될 기술의 싹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미래기술의 싹은 성장하면 그 자체로 인류의 지식을 넓혀나가는 데 기여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좋은 계기가 생기면 혁신적 제품이 되어 경제성장에도 도움이 되고, 국가적인 전략기술로서 국민의 삶에도 기여하게 된다.

국가 전략기술은 미래의 먹거리

미국 코네티컷 웨스트헤이븐의 월마트에서 약국 약사가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을 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형 유통매장 내 약국에서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한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코네티컷 웨스트헤이븐의 월마트에서 약국 약사가 모더나의 코로나19 백신을 들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형 유통매장 내 약국에서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한다. [로이터=연합뉴스]

2020년 1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화이자와 모더나의 이름도 생소한 mRNA 백신을 승인했을 때 사람들은 무엇보다 그 신속한 개발 속도에 놀랐다. 아직까지 백신에 적용된 것이 없는 새로운 기술 플랫폼이라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만들 수 있었지? 당연히 한국은 왜 그렇게 빨리 만들지 못할까 하는 안타까움도 섞인 반응이었다. 이런 궁금증을 풀어줄 이야기가 지난 9월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실렸다.

화이자와 모더나의 백신기술은 1961년 발견된 mRNA에 대한 기초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87년 캘리포니아 솔크 생물학연구소의 로버트 말론은 약물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알려주는 중요한 실험을 했다. mRNA가닥과 지방을 섞은 분자 혼합물 속에 있던 세포가 mRNA 유전정보를 해석해서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이후로도 수십년간 크고 작은 연구 결과가 축적되어 갔다.

2000년대 이후에는 mRNA를 이용한 약물제조분야의 작은 벤처기업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바이오엔텍(BioNTech)과 모더나(Moderna)도 각각 2008년, 2010년 설립된 신생벤처다. 후에 바이오엔텍은 기술의 스케일업을 위해 화이자와 손을 잡았고, 모더나는 독자적인 스케일업 전략을 택했다.

미 국방부 산하 국방고등기술기획국(DARPA)도 미래 기술분야의 씨앗을 육성한다는 차원에서 2010년부터 mRNA 기술 개발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모더나도 그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고, 한정 없는 자금과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백신 개발을 위해 미국 정부가 100억 달러(약 11조원)를 긴급 지원했다. 가능성만으로 존재하던 mRNA 기술이 갑자기 백신의 새로운 후보 기술로 떠올랐다. 2020년 1월 코로나바이러스의 유전체 서열이 공개된 후 불과 며칠 만에 바이오엔택과 모더나는 후보물질을 만들었다. 모더나와 화이자는 각각 15억 달러와 2억 달러의 정부 지원을 받았고, 민간투자가 합쳐지면서 스케일업을 위한 자금문제가 해결되었다. 긴급 승인제도 덕분에 임상 또한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다. 창업 10년 차를 갓 넘긴 모더나도 100조원이 넘는 바이오 분야의 거인급 기업이 되었다.

연구자 수백 명이 쌓아온 벽돌들

mRNA를 연구한 미국 과학자 로버트 말론의 공책. 실험쥐에 주사하기 위한 mRNA 합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네이처]

mRNA를 연구한 미국 과학자 로버트 말론의 공책. 실험쥐에 주사하기 위한 mRNA 합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네이처]

mRNA를 이용한 의약품 제조기술은 이제 주목받는 한 분야가 되었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다 꽃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기술분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에 의지한 채 수백 명 연구자들이 벽돌 한 장씩을 얹었다. 앞서 언급한 ‘네이처’ 기사에서도 밝혔듯이 머지않아 노벨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집단적 진화의 과정에서 누구를 뽑아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바이오 분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요즘 누구나 이야기하는 인공지능의 머신러닝 분야도 마찬가지다. 머신러닝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프리 힌튼도 지금에야 모든 사람이 인정하지만, 오랫동안 전망 없는 분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지금까지 없던 기술이 탄생하는 과정은 마치 생물의 세계에서 오랜 시간을 거쳐 하나의 새로운 종이 발생해나가는 분화(speciation) 과정과 흡사하다. 교과서에 없는 문제, 혹은 교과서가 불가능하다고 한 문제에 도전하는 것이 시작이다. 오래 버텨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주류 학계의 냉랭한 시선을 견디는 것도 필수다. 연구비를 딸 기회도 많지 않고, 작은 국가과제로 연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분야의 기술과 결합되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되면서 작은 틈새 분야(niche)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힘겹게 진화하는 중에 기술을 둘러싼 환경조건이 갑작스럽게 유리하게 바뀌는 기회가 온다.

mRNA의 경우에는 코로나 백신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그러한 기회였고, 머신러닝의 경우에는 컴퓨터 계산성능이 급속하게 발전한 것이 좋은 계기였다. 갑자기 꽃이 피기 시작하고,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었더라는 말처럼 관심이 폭발하면서, 돈과 기업들이 모이고 상업화를 위한 스케일업이 급속하게 진행된다. 이렇게 미디어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나면 일반인들은 숨어 있는 수십 년의 시간은 뒤로한 채 혁신적 기술이 탄생했다고 놀라워한다.

추격국에서 벗어날 시간 맞은 한국

선도국은 규모가 큰 전략기술과 함께 전망이 불투명했던 mRNA 기술처럼 미래의 분야 하나씩을 열어갈 수 있는 작은 싹을 많이 키우고 있는 국가다. 기존의 교과서를 벗어나 새로운 교과서를 쓰는 힘을 가진 국가라는 뜻이다.

반면 추격국은 이런 힘겨운 진화과정을 거쳐 정립된 분야, 즉 교과서가 있는 분야에서 선도국과 같은 수준의 성과를 내는 데 주력한다. 성공적 추격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정해진 분야에서 선도국 수준을 뛰어넘는 이른바 세계 최초, 세계 최고의 성과가 이곳저곳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추격국에서 진정한 선도국으로 변신을 시작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신호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서 있는 바로 그 단계다.

우리가 열심히 외우고 시험을 쳤던 교과서의 내용은 불변의 진실이 아니다. 인류의 현재 이해 수준에서 최선의 것을 기록해놓은 것일 따름이다. 새로운 발견이 더해지면서 교과서 자체는 계속 고쳐지고, 새로운 분야의 교과서가 등장한다.

선도국은 기존의 교과서에 도전하면서 없던 분야의 교과서를 새로 만들어온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반면 지난 추격 기간 동안 우리는 선도국의 교과서를 정답처럼 주어진 것으로 수용하고 익히는 데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교과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교과서 밖으로 나가는 일이 두려운 이유다.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알려진 분야에서 선도국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내겠다는 추격형 연구 제안서가 넘친다. 위험이 너무 커서 정부가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공공 연구과제들도 대부분 성공으로 보고되고 있다. 문제 자체가 정립된 교과서 안에서 도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해외 대학에 막대한 연구자금을 주면서 공동연구를 하자고 찾아다니는 이유도 교과서 안이 아니라 교과서 밖의 씨앗을 구하기 위해서다.

담대한 비전 지닌 젊은 연구자 많아

최근 정부도 기존 개념을 벗어난 혁신적 기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문샷(moon shot·1960년대 미국의 달 탐사선 발사)과 같은 목표를 내걸고 지원 정책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무엇보다 선도국을 뛰어넘겠다는 상대적 목표가 아니라 불확실하더라도 알려지지 않은 분야의 탄생을 목표로 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성공이냐 실패냐가 아니라 작은 규모라도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여러 싹을 지원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몇 권의 교과서를 썼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선도국에서 만들어진 이론을 충실히 설명한 것이었다. 10년 전쯤 내가 썼던 교과서의 분야를 떠나기로 했다. 그 후로 하나의 주제를 붙들고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갈 길은 여전히 까마득한데, 모범이 없으니 그저 하루하루가 답답하다.

우리 연구계 곳곳을 돌아보면 내가 꿈꾸는 수준이 티끌처럼 보일 정도로 훨씬 더 담대한 비전을 가진 연구자들이 있다. 특히 추격의 기억이 상대적으로 적은 젊은 연구자들의 도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기존의 교과서를 넘어 새로운 분야를 지향하는 이들의 도전을 장기적 안목으로 키우는 선도국가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도전의 가치를 인정하고 끈기있게 기다려주는 분위기가 절실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