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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안 변하면 벽창호"…그의 입에서 '기본소득' 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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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선대위 출범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후보는 이날 연설에서 자신의 어젠다인 '기본소득'을 언급하지 않았다. 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경기장에서 열린 선대위 출범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후보는 이날 연설에서 자신의 어젠다인 '기본소득'을 언급하지 않았다. 국회사진기자단

“기본소득은 시대적으로 안 맞는 거 아니냐.”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이뤄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이낙연 전 대표 캠프 출신 의원들의 만찬에서 나온 말이다. 이 후보는 ‘명·낙대전’으로 벌어진 이낙연계 의원단과의 거리감을 좁히는데 애썼지만, 이날 날 선 질문을 여럿 받았다. 그 가운데엔 이 후보의 대표 어젠다인 기본소득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일부 참석자에 따르면, 당시 신동근 의원은 이 후보에게 “양극화 불평등 해소가 시대적 과제인데 기본소득은 되레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어서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기본소득은 이낙연 전 대표의 공약인 ‘신복지’와 비슷하다”며 “이 전 대표가 18살까지 아동수당을 늘리자고 하는데 그것도 전 국민 아동에게 주는 기본소득 아니냐”라고 답했다.

한 참석 의원은 5일 중앙일보에 “이 후보도 진땀을 흘렸을 것”이라며 “그래도 기본소득과 다른 후보의 복지 정책을 열어놓고 결합할 수 있다는 취지로 들렸다”고 전했다.

이재명 “안 변하면 벽창호”…기본소득론자는 2선에

기본소득에 대한 여론도 호의적이진 않다. 지난 3일 발표된 문화일보·모노리서치 여론조사(지난달 20~21일)에서 응답자의 65.1%는 “소득·자산 등과 상관없는 기본소득제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근로의욕 실추 및 도덕적 해이 유발’(40.0%), ‘재정 악화’(26.0%), ‘소득 불평등 심화’(14.5%)가 반대의 이유였다. 이와 관련 수도권 초선 의원은 “기본소득은 이 후보의 핵심 의제지만, 무작정 밀기에는 부담스러운 환경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이재명 민주당 후보(앞줄 왼쪽 셋째)는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2021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를 열었다. 이 후보는 경선기간에도 '기본소득'을 강조했지만 본선 국면에선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뉴스1

지난 4월 이재명 민주당 후보(앞줄 왼쪽 셋째)는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2021 대한민국 기본소득 박람회'를 열었다. 이 후보는 경선기간에도 '기본소득'을 강조했지만 본선 국면에선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뉴스1

실제 이 후보도 지난달 10일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직후 연설에서 “세계 최초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을 끝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언급은 줄이고 있다. 지난 2일 민주당 중앙선대위 출범식 연설에선 “저의 1호 공약은 성장의 회복”이라고 말했을 뿐, 기본소득에 대해선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당내에선 “이 후보가 기본소득 전략에 수정을 시작했다”(서울권 재선)는 평가가 나온다. 이 후보도 지난달 31일 공개된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경선 후보일 때의 주장과 정책, 당의 공식 후보일 때의 주장과 정책, 대통령의 주장과 정책은 다를 수밖에 없다”며 변화를 시사했다. “변화되는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하는 상황이 있는데도 안 변하는 것은 벽창호”라고도 말했다.

이 후보는 중앙 선대위 인선에서도 ‘기본소득론자’들을 뒤로 물렸다. 지난 2일과 4일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중앙선대위 인선에서 이 후보를 도와온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등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기본소득 설계자’로 알려진 강 교수는 이 후보의 정책자문그룹 ‘세상을 바꾸는 정책 2022’(세바정 2022)에서 ‘기본소득 특별연구단 공동위원장’을 맡았고, 최 교수는 경선 캠프 정책조정단장이었다. 당내에선 “기본소득론자들이 전면에 배치될 거란 예상이 빗나갔다”는 말도 나온다.

대신 이 후보는 중앙선대위에 ‘전략적 공정성장 전략위원회’라는 후보 직속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곤 주류 거시경제학자이자 한국은행 출신의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를 위원장에 임명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 중앙선대위 핵심 인사는 “대선에서 ‘성장 담론’은 빠질 수 없는 화두다. 선명한 성장 정책을 선보일 것”이라고 전했다.

‘청소년·노인 기본소득’ 꺼낸 이재명…“유연한 정책”

기본소득 정책의 방향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이 후보는 지난달 31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18∼29세 청년 기본소득, 60세 퇴직 후 연금을 받는 65세까지 장년 기본소득 등이 부분 기본소득”이라며 ‘부분 기본소득’을 통해 당내 경선 경쟁자들과의 접점을 마련하겠단 구상을 내놓았다. 경선 기간 ‘전 국민에 연 100만원 지급’을 골자로 발표했던 보편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것은 당과 협의해서 정해야 한다”며 여지를 뒀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주식시장 발전과 개인투자자 보호를 위한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병욱 민주당 의원, 이 후보, 이소영 민주당 의원. 국회사진기자단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주식시장 발전과 개인투자자 보호를 위한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김병욱 민주당 의원, 이 후보, 이소영 민주당 의원. 국회사진기자단

이에 대해 민주당 선대위 인사는 “전 국민 대상 기본소득은 예산 등 고려사항이 적지 않다. 서둘렀다가 반발이 나올 수 있으므로 점진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라며 “반면 ‘부분 기본소득’은 당선 후 바로 실행할 수 있으므로 유권자의 체감도가 높아 적극적으로 검토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후보는 기본소득 재원으로 ‘국토보유세 신설’을 주장했었다. 이에 당내에선 “대선 초반 증세 논란으로 스텝이 꼬일 수 있어 우회 접근하는 것”(수도권 재선)이란 관측도 있다.

이와 관련 이준호 에스티아이 대표는 “본선까지 기본소득을 지속해서 주장하면 표 확장에 도움이 안 될 거라고 봤을 수 있다”며 “향후에도 ‘사이다’라는 후보 캐릭터는 유지하면서 정책은 유연하게 설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한국정당학회장)는 “중도 확장을 위해 기본소득 설계 수정이 불가피하지만 오히려 집토끼엔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며 “진보 후보로서의 보편적 복지 정책을 오히려 강하게 주장하는 게 경쟁자들과 차별화하는 지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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