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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

소프트파워와 한국을 보는 미국인들의 달라진 시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지난 10년 동안 한국 대중음악·영화·드라마·음식 등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류(K-Wave)’라는 한국의 소프트파워에 대해 많은 질문을 받았다. 오랫동안 나의 대답은 “라떼는 말이야”의 변형이었다. 1970~80년대에 한국에서 지낸 행운을 누렸고 세계가 한국의 멋진 가능성에 눈뜨기도 전에 이미 그 잠재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음악·영화·미술의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호소력이 민주주의와 번영 그리고 글로벌 노출을 통해 세계에 폭발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말이다. 그래서 한국이 자랑스러웠고 조금은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2008년 신임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돼 서울로 갈 준비를 할 무렵 워싱턴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라고 소개했을 때 그들이 놀란 표정을 짓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진정한 케이팝(K-POP) 팬이든 아니든 최신 트렌드를 따라잡고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팬데믹으로 자가격리 중인 대중에게 인터넷을 통해 확산된 한국의 문화 콘텐트는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한국을 알게 되는 핵심적인 렌즈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콘텐트는 계속해서 경계를 허물며 놀라움과 자극 그리고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 봤니?” 많이 물어봐
K-콘텐트, 한국을 보는 핵심렌즈
한·미 서로의 시선도 변하고 있어
새로운 시선, 한국 위상에도 영향

나는 항상 한국에 대한 오만가지 질문을 받는다. 전 주한 평화봉사단원, 전 주한 미국대사, 코리아 소사이어티 이사회 의장 그리고 한·미관계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장으로서 이런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일의 일부이자 개인 정체성의 큰 부분이기도 하다. 최근 몇 주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전망도 한국의 대선 상황도 아니었다.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의 한국의 역할도 물론 아니다. 바로 “당신은 오징어 게임을 보았는가?”였다. 봤다고 해놓곤 외교관답게 질문자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기다린다. 이럴 때면 경쟁, 불평등, 공정,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선택의 자유, 폭력, 세대·문화 격차, 한국과 미국의 유사점, 언어, 성 역할 등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대화가 이어진다.

최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드라마 시청은 스트레스와 불안에 탁월한 해독제”라고 보도했다. 얼마 전 외교정책 전문가들과 한국 대통령의 임기와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왜 그렇게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라고 말한 참석자도 있었다. 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라는 사실 자체보다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면 실제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맥락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호소력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역대 한국 정권과 많은 한국인들은 수십 년간 미국인들이 한국을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는 것조차도 부정적이거나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걱정해 왔다. 1980년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미국 드라마 ‘매시(M.A.S.H)’에 대해 한국인들이 불평했던 것을 기억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야전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야기였는데 한국인들은 이 드라마에서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각이 왜곡되어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변명을 하자면 그 드라마는 사실 한국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한미친선 조직인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을 잊고 싶어 하던 무렵인 1957년 한국에서 군 복무를 하고 퇴임한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장군이 설립한 비영리단체다. 지난해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버추얼 갈라쇼를 통해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들과 방탄소년단(BTS)에게 밴 플리트상을 수여했다. 언뜻 부조화스러울 수 있는 조합이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오래전 함께한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대해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했고 참전용사들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활력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올해는 뉴욕의 상징인 플라자 호텔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연례 만찬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는 제너럴 모터스(GM)와 LG의 전기자동차 생산 노력을 치하하는 한편 한·미 양국이 기후변화에 공동 대처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번 연례 만찬 행사에 처음으로 한국전 참전용사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생존한 참전용사들의 숫자가 매년 줄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4일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구역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관 건립을 위해 마지막 일생을 보냈던 한국전 참전용사 존 스티븐스 대령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알링턴 국립묘지를 방문해 참배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과 미국이 공유하는 역사와 그 역사를 일군 사람들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그 노고를 연구하고 계속 배워가야 한다. 동시에 미국인과 한국인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이런 변화하는 시선이 양국 관계의 미래와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정립할 것이기에 앞으로 보다 심도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