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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경쟁에 글로벌 공급망 흔들…통상전략 새로 짜야

중앙일보

입력 2021.10.2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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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기술경쟁 시대의 생존 전략

지난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공급망 복원에 관한 최고경영자(CEO) 화상 회의에 참석해 실리콘 웨이퍼를 들어 보이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지난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공급망 복원에 관한 최고경영자(CEO) 화상 회의에 참석해 실리콘 웨이퍼를 들어 보이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미국 6개 지역에 3년간 116조원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는 대만 반도체 업체 TSMC가 지난 7월 독일에도 투자 의사를 밝혔다. 9월에는 인텔이 향후 10년간 유럽의 8개 팹에 113조원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정책에 대응해 유럽연합(EU)이 반도체 생태계를 재건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지난 2월 행정명령으로 반도체·전기차 배터리·의약품·희토류 4개 핵심 전략산업의 공급망 위험에 대한 대책 마련을 지시한 후 이들 산업뿐 아니라 첨단기술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공급망이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경제전쟁을 벌이는 미국·중국뿐 아니라 EU·일본·한국·대만 등을 중심으로 공급망이 지역화·다변화 조짐을 보인다. 특히 5G를 통한 미래 통신 인프라, 인공지능, 양자 컴퓨터, 자율주행 자동차 등 산업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꿀 혁신기술의 기반이 되는 반도체산업은 막대한 보조금을 앞세운 선진국들의 노골적인 산업정책 각축장이 됐다. 또다시 우리 산업과 경제는 변곡점이 될 도전과 기회에 직면했다.

바이든, 전략산업 생태계 전면개편
미·중 간 중복투자, 무역분쟁 가속
선진국 노골적 각축장 된 반도체
우리도 산·관 협력체계 강화해야

바이든의 공급망 디커플링 전략

트럼프 전 대통령이 무역수지 적자를 국가안보 문제로 내세우면서 무역보복 조치를 강행할 때 그 대상은 중국만이 아니라 EU·캐나다·일본·한국 등 전통 우방국도 가리지 않았다. 결국 미·중 무역충돌 속에서 EU 등 대부분의 국가가 중국 시장에서 대미 무역 손실을 만회하며 오히려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성을 키웠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입 통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 시기 중국의 대미 수입은 12% 감소했으나 EU 수입은 약 5% 증가했고, 일본과 호주 수입도 각각 7%, 13% 증가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적 신뢰를 상실하는 시기에 중국은 일대일로 사업에 한국·싱가포르·이탈리아 등 99개국을 추가해 기존 39개 개도국 중심 협의체를 약 140개국이 참여하는 세계적 규모의 경제협력체로 확대했다. 다양한 국제기구에 중국 인사들의 진출이 대폭 확대되고 중국 기술 규격이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는 빈도가 급증했다. 중국을 제재하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의지와는 달리 글로벌 공급망에서 사실상 중국 중심의 공급망체계가 한층 강화됐다.

대표적 사례가 화웨이 5G 기술의 확산이다. 중국의 대규모 차관과 원조는 일대일로 사업에 참여한 개도국들이 화웨이 5G 설비를 채택하는 주요 재원이자 요건이다. 또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을 통해 관련 기술 규격을 국제표준으로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반대에도 다수의 EU 국가까지 화웨이 장비와 기술을 도입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무역적자보다 기술 경쟁력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 안보를 통상정책의 핵심 사안으로 다룬다. 기술 생태계를 떠받치는 전략산업의 생태계와 공급망을 전면 개편하고 있다. 주요 동맹국들과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EU와는 지난 9월 10개 분야 작업반을 망라한 무역·기술협의회를 공식 출범했고, 일본과도 정상회담을 계기로 기술통상협의체를 마련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 안보에 핵심적인 산업으로 철강·알루미늄·자동차·반도체·조선·항공산업을 지목하고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수입 제한 조치를 강행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략 기술을 선정하고 이를 토대로 무역과 투자를 제한하는 한편, 자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생산구조와 공급망을 재편성하고 있다. 상무부는 수출통제개혁법의 수출 통제 대상이 되는 신흥 기술(emerging technology)을 확정하기 위해 산업계와 협의 중이며, 조만간 또 다른 제재 근거인 기반 기술(foundational technology)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처럼 수출 통제 대상이 되는 기술 범위가 대폭 확대되면서 향후 첨단산업 분야의 대중국 세계 무역이 상당 부분 제한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무부도 투자심사대상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지난해 이미 중국으로부터 투자를 2016년 대비 15% 수준으로 격감시킨 상황에서 미국 기업이 중국에 투자하는 것까지 제한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디커플링과 공급망 지역화

2018년 4월 중국 허베이성 우한의 신신반도체(XMC) 제조 공장을 둘러보는 시진핑 국가주석. [신화=연합뉴스]

2018년 4월 중국 허베이성 우한의 신신반도체(XMC) 제조 공장을 둘러보는 시진핑 국가주석. [신화=연합뉴스]

미국의 기술과 설비로부터 차단된 중국은 독자적 기술과 산업 표준을 구축하기 위해 ‘중국 표준 2035’를 표방하고 나섰다. 최근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기술 자립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공급망을 분리해 기술·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미국 의회 산하 미중경제안보검토위원회는 중국이 국제 표준화 전략으로 기술 열위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선점하는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더욱이 바이든 행정부의 공급망 재편 전략은 주요 선진국에 연쇄 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기술과 예산을 동원할 수 있는 EU·일본·대만·한국은 모두 자체적인 공급망 강화 전략을 천명하고 대규모 투자 확대에 돌입했다. 기존 글로벌 공급망이 미·중으로 양극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으로 분절화하는 것이다.

현재 급속히 거점별로 분리되는 공급망의 주목할 특징은 1990년대 초 소련 붕괴로 잊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 이념 대결의 부각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중 관계를 극한 대치 상황으로 몰아갈 때 대부분 국가는 중립을 표방하며 양국 시장에서 반사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 공산당을 비민주적 권력으로 적대시하면서 공산권과 민주국가들로 진영을 분리하고 있다. 대미 무역수지라는 경제적 손익 문제를 떠나 이념과 원칙을 앞세운 편 가르기의 대척점에는 중국·러시아·북한·이란을 내세우고 있어 더는 중립이라는 전략적 모호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또 신남방정책으로 우리 산업의 교두보로 부상한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에 비해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인도·대만의 위상이 한층 커졌다.

단일 생태계로 통합된 글로벌 공급망이 지역을 중심으로 분절화하면 공급망 간 중복투자와 무역분쟁 불씨가 되살아난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산업 전략과 통상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설립 이후 중국·러시아·베트남 등 구공산권 국가까지 대거 합류해 회원국 수가 164개로 증가하면서 세계무역체제는 통합된 글로벌 공급망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2016년을 기점으로 WTO에서 무역 규모와 기여금 1위 회원국으로 부상한 중국과 인도·브라질을 위시한 개도국들의 강경한 입장은 WTO의 협상을 사실상 마비시켰다. 대신 대부분 회원국의 실질적인 통상정책은 자유무역협정(FTA)이 대체하게 됐고, 산업계는 FTA 시장 개방 일정에 맞추어 무역과 투자구조를 조정했다.

그러나 최근 전개되는 공급망 재편은 FTA 협상을 통해 주요 교역국과 무역 구조를 조정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기존의 어떠한 FTA를 통해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과 규모로 추진된다. 범정부 차원의 전면적인 FTA 협상을 활용하는 대신 전략산업의 기술 생태계와 생산공급망 상황에 따라 생산구조를 급격히 바꾼다.

공급망 재편 대응하는 정책 필요

우리 정부도 다른 국가들처럼 FTA 협상체계로 통상정책 구조나 조직을 운영하는데, 공급망 재편 전략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과 조직이 필요하다. 산업정책과 과학기술정책, 안보정책과 통상정책이 전방위적으로 융합되는 시점에 효율적 정책 협력과 조율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백악관이 지휘하고 미 무역대표부(USTR)가 총괄 관리하며 각 부처가 해당 산업의 공급망을 실질적으로 재편하는 유기적인 체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범부처 체제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산업계도 현재 진행되는 공급망 재편의 영향을 파악하여 경영 전략을 보완해야 한다. 최근 전개되는 첨단산업의 공급망 재편으로 산업 지형은 더욱 양극화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사태로 가속화된 디지털 전환은 대부분 산업의 글로벌 공급망 작동을 한층 심화할 것이다. 반면 반도체· 배터리같이 전략산업으로 지목돼 공급망이 인위적으로 재편되는 산업 부문은 해당 제품의 생산업체뿐 아니라 전후방 산업에도 디커플링이 확산될 우려가 크다.

FTA 협상으로 통상 환경이 바뀔 때는 협정이 타결되고 발효될 때까지 산업계에 적어도 3~4년의 적응 기간을 줬다. 그러나 백악관과 EU 집행위가 주요 기업들과 직접 담판하면서 공급망을 재편하는 현시점에서는 그러한 여유가 없다. 게다가 수년간 수십조원에 달하는 투자와 생산구조 재편 과정에서 예상되는 숱한 문제를 정부 간 협정으로 보호받는 절차도 확보하지 못한다. 전례없이 진행되는 기술 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우리의 산·관 협력 체계와 통상 전략 개편이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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