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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미래에서 온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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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현재에게.

노파심에 펜을 들었네. 일곱 살 노래 신동 김유하양이 TV 프로그램에서 부른 ‘아! 옛날이여’를 들으며 눈물 흘리는 자네 모습이 염려가 되네. 물론 노래는 환상적이었네. 일곱 살 소녀가 부르는 노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 그렇다고 굳이 울 필요는 없었네. 일곱 살에게도 ‘옛날’이 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충격이긴 했지만, 초등학생이 유치원생에게서 세대 차이를 느끼는 세상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니네.

우리의 기억은 과거를 미화
미래가 되면 현재를 그리워할 것
현재 좋은 점을 현재에도 누려야

요새 자네는 낮잠을 자지 않더군. 시집도 읽지 않아. 일요일이면 느지막이 일어나 소설을 읽던 모습도 사라졌어. 자네와 내가 함께 동경했던 데이비드 소로의 여백 있는 삶이 자네에게서 없어진 것 같네. 그러니, 지금보다 옛날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던 것 같네.

그런데 말이지. 얼마 전에 『팩트풀니스』와 『지금 다시 계몽』이라는 책을 읽고, 현재의 삶이 과거의 삶보다 얼마나 더 좋아졌는지에 대해 열띠게 토론하지 않았던가? 과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경계하자고 굳게 다짐했건만, 어찌 과거를 그리 미화하는가.

향수에 젖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네. 향수라는 감정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네. 최근에 나온 행복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보내준 적도 있지 않은가.

현재여, 자네가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네. 아니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주 망각하는 것이지. 옛날도 한때는 현재였고 미래였다는 사실일세. 자네도 잘 알다시피 자네가 한탄해 마지않는 지금도 조금만 지나면 ‘아! 옛날이여’가 될걸세. 그리고 자네가 그리워하는 그 옛날도 그 순간에는 지치고 힘든 현재였다네. 솔직히 자네는 옛날에도 ‘아! 옛날이여’를 부르며 그 이전의 옛날을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기억은 말일세. 의식에서 좋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끄집어낸다네.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포장하기도 하지. 소위 ‘라떼는’ 늘 지금보다 좋게 회상되는 법이지. 만일 기억이 부리는 이 마법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 순간도 시간이 흘러 과거가 됐을 때는 그리움의 대상이 될걸세. 여유와 여백이 가득했던 옛날로 회상될 거란 말일세.

지금, 이 순간에도 먼 훗날 자네가 ‘아! 옛날이여’를 부르며 그리워할 순수와 여유와 낭만의 요소가 가득하네. 주변을 살펴보게.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고, 옛날의 자네처럼 좋아하는 음악과 좋아하는 가수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옛날에는 없었던 넷플릭스마저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아! 옛날이여’를 부르며 한때는 지금이었던 옛날을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아! 지금이여’를 부르며 지금의 지금을 음미하고 만끽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미래에 그리워하게 될 것들을 지금 미리미리 채워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끔 자네를 보면 “와! 이건 꼭 사야 해!”라고 외치며 지갑을 열던데, “와! 이건 꼭 지금 해야 해!”라고 외치며 미래의 자네를 위해 시간을 내보게.

내가 미래에 와보니 가장 그리운 것, 그래서 지금의 자네가 자주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경험이네. 별거 아닌 걸 가지고 티격태격하며 쏘다녔던 기억이 가장 그립다네. 그러니, 지금이라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내서 몰려다니게. 종일, 아니 2박 3일로 몰려다니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데 힘쓰게. 너무 노는 것 아닌가 하는 죄의식이 들어도 꾹 참아내야 하네.

소박해도 좋았던, 아니 소박해서 더 좋았던 가족끼리의 몰려다님도 빼놓을 수 없네. 각자의 방을 두고 굳이 한 방에서 함께 잤던 기억, 모기에 물리는지도 모르고 놀았던 캠핑, 2002년 월드컵 때 가족과 함께한 길거리 응원도 정말 그립네. 그러니 시간을 내서, 돈을 써가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게. 그것이 미래의 자네를 위해 지금의 자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네.

뭔가에 홀린 듯 열심이었던 기억 역시 미래가 몹시도 그리워하는 것이네. 돈 때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하느라 열심이었던 경험이 자네에게도 있을걸세. 자네도 한때는 단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도서관에서, 연극무대에서, 연습실에서 밤을 지새우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몰입의 경험을 많이 하게나. 정원을 가꾸든지, 산에 오르든지, 글을 쓰든지, 아니면 스포츠에 몰두하든지 뭔가에 미치는 경험을 많이 하시게. 살아보니 벽(癖) 하나쯤은 있는 게 좋아.

꼰대 같은 편지를 마치려 하네. 우리의 지금은 미래의 우리가 그리워할 정말 좋은 것들로 가득하다는 점을 꼭 잊지 말게.

P.S. 유하양의 노래는 정말 좋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