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고 복 누리시라’ 100번 반복…문자에 녹인 희망가

중앙선데이

입력 2021.09.25 00:20

업데이트 2021.09.2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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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5호 19면

‘문자도’의 재발견 

우리 민화(民畵) 알리기에도 진력해 온 서울 삼청동 현대화랑이 2018년 ‘민화, 현대를 만나다’를 잇는 후속전으로 ‘문자도, 현대를 만나다’(9월 14일~10월 31일)를 시작했다. “근현대 미술을 50년간 다뤄 오면서 과연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 어떤 것인지를 늘 생각해 왔다”는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이 조형적으로 탁월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조선 후기 문자도 11점과 현대 미술가 3인의 문자도 응용 작품 13점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다.

문자도(文字圖)는 말 그대로 문자를 이미지로 표현한 그림이다. 문자이면서 그림이고, 그림이면서 문자다. 조선 시대 문자도는 크게 ‘길상(吉祥)문자도’와 ‘유교(儒敎)문자도’로 나뉜다. 길상문자도는 행복의 복(福), 출세의 녹(祿), 장수의 수(壽)자를 그린 그림으로, ‘복’자와 ‘수’자를 다양한 모양으로 각각 100번씩 쓴 ‘백수백복도’가 대표적이다.

문자이면서 그림이고, 그림이면서 문자

문자도(19세기·부분),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각 62x32.5㎝. [사진 현대화랑]

문자도(19세기·부분),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각 62x32.5㎝. [사진 현대화랑]

유교문자도는 유교의 주요 덕목인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를 그린 그림이다. 정병모 한국민화학교 교장(경주대 특임교수)은 “유교문자도의 탄생은 다른 나라 문자도와 구별되는 조선 시대 문자도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나라에는 충성하고, 벗을 사귐에 신의를 지키며, 예절을 다하고, 정의롭게 행동하며, 청렴결백하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유교 윤리의 여덟 덕목을 단순히 문자만으로 썼다면 지나치게 교조적인 느낌이 들었을 텐데, 꽃이나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담긴 그림들로 꾸며 자연스럽게 흥미를 갖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유교문자도가 주로 병풍으로 제작된 것도 흥미롭다. 정 교장은 “병풍은 생활 속에서 요긴한 도구이면서 양반의 상징이었다”며 “조선 후기 서민 계층이 성장하면서 서민들의 양반 문화에 대한 동경이 유교문자도 성행의 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유교문자도의 각각의 글자에는 관련된 전설과 설화, 상징 동식물의 문양이 빼곡하게 들어있다. 가장 먼저 시작되는 글자인 ‘효’의 경우, 추운 겨울에 어머니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자 얼음을 깨뜨려 고기를 잡은 왕상의 설화나 병든 어머니를 위해 한겨울에 죽순을 찾아 치료한 맹종의 설화 속 상징물을 그리는 식이다.

문자도(19세기 후반·부분),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각 61x36㎝. [사진 현대화랑]

문자도(19세기 후반·부분), 8폭 병풍, 종이에 채색, 각 61x36㎝. [사진 현대화랑]

이번에 소개되는 문자도에는 문자도별로 다양한 도상과 기물이 형형색색 현란한 필치로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최근의 난잡한 정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두 글자 ‘염(廉)’과 ‘치(恥)’자를 보자. ‘염’자도에는 단연 봉황이 주인공이다. 상상의 동물인 봉황은 고고함의 상징이다. 아무 데나 앉지 않고 오동나무에만 앉으며, 아무거나 마시지 않고 염천만 마시며, 아무거나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인 죽실만 먹는다고 전해진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하는 ‘치’자의 경우 주나라 무왕의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지적하다가 수양산에 은거한 백이와 숙제를 기리는 수양산의 매화와 달이 주로 그려진다.

손동현 작가의 ‘SCARLET CRIMSON’(2019~2020), 130x194㎝. [사진 현대화랑]

손동현 작가의 ‘SCARLET CRIMSON’(2019~2020), 130x194㎝. [사진 현대화랑]

미술평론가 안현정은 문자도의 확장성에 주목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실생활에 쓰이는 실용적 홍보성과 판화 형식의 인쇄술까지 도입해 대량생산 방식과 결합했는데, 이는 다른 전통회화가 서구화된 감각에 적응하지 못한 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한 것과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산업화·도시화에 따른 모던한 근대 감각과 잘 맞아떨어지는 ‘세련된 개방성’을 지닌 우리의 문자도는 중국·일본·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보아도 문자의 자획이 상당히 독특해 세계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자유로운 상상력 현대 계승 모색할 때”

신제현 작가의 ‘문자경(文字景·부분)’(2021), 캔버스에 아크릴, 투명 아크릴 판 위에 아크릴, 각 92x66㎝ (8폭). [사진 현대화랑]

신제현 작가의 ‘문자경(文字景·부분)’(2021), 캔버스에 아크릴, 투명 아크릴 판 위에 아크릴, 각 92x66㎝ (8폭). [사진 현대화랑]

이번 전시의 특징 중 하나는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협업이다. 고교시절 전국서예대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던 작가 박방영이 그려낸 작품은 상형문자로 쓴 그림일기 같기도 하고, 일상에 녹여낸 그래피티 같기도 하다. 먹과 잉크를 한 화면에서 함께 사용하는 작가 손동현은 서예· 그래피티·출판만화의 표현기법을 가져와 붓으로 쓰거나 칠하고 분무기로 뿜어내 작품을 완성한다. 좌충우돌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정평이 난 작가 신제현은 새와 꽃이 가득한 ‘화조문자도’를 비틀어 ‘금기와 예의’ ‘천대와 환대’의 경계를 묘하게 넘나든다.

정 교장은 “문자도는 애초에 그 문자가 가진 주술적인 영험에서 비롯된 그림”이라며 “길거리 벽화를 지칭하는 그래피티(Graffiti)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끄는 것처럼 자유로운 상상력이 담긴 문자도를 현대에 계승할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관람은 온라인 사전 예약제로 운영된다. 성인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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