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미국인과 영어로 말싸움···날 가슴뛰게한 패티김 반전"

중앙일보

입력 2021.09.25 00:10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30〉뛰어난 가수 선배

내 도그(dog)망신의 역사는 자못 길다. 나는 지난번엔 2회에 걸쳐 내가 70평생을 사는 동안의 망신과 모멸과 거기에서 반사적으로 얻은 주옥같은 평생 교훈에 대해 썼다.

총 3전 3패. 첫 번째 패전. 돈 문제에 관한 전쟁을 한양대 김연준 초대 총장님을 상대로 벌였던 도발과 무참히 깨진 응전이었다. 이어서 두 번째, 남 얘기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전쟁은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 목사님의 꼬리를 밟았다가 되치기당했던 전쟁의 상처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요무대’의 존경하는 김동건 선배님과 벌였던 스케이트 전쟁, 워터게이트나 정치적 게이트가 아닌 얼음 지치는 단순한 썰매 게이트(?) 사건. 물론 무참히 깨진다. 모든 싸움이 30여년 전쯤 내가 한참 젊어 내 깐에는 잘나가던 시절 얘기들이다. 참 교훈적인 얘기들이다. 학교에선 죽었다 깨나도 배울 수 없는 진짜 교육들이었다. 순전히 공짜로 배운 교훈. 그럼 그런 몇 가지 교훈뿐이었느냐. 아니다. 믿지 않겠지만 또 있다. 뭐라구! 그렇게 재밌고 흥미로운 교훈이 또 있었다구.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더 있다.

지금 읽고 계신 중앙SUNDAY의 독자님들께만 털어놓겠다. 좌우지간 우좌지간 각설하고 지난번의 내가 느낀 모욕감이나 굴욕감, 그리고 교훈들은 일정한 상대가 있어서 일대일의 전면전 양상의 형태였다. 쉽게 말해 김연준 총장님이나 김장환 목사님 그리고 김동건 아나운서님이 내 코(별로 높지도 않은)를 더 납작하게 만든 교훈은 내 쪽에서 싸움을 걸었다가 배우게 된 교훈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교훈의 양상은 형태부터가 다르다. 그러니까 이번엔 나 혼자서 그냥 제풀에 코피 쏟은 일도 있었다는 얘기다.

대학 초년생 때 패티김 보고 가슴 뛰어

스튜디오에서 함께 녹음 중인 조영남씨와 패티김. 조씨는 1997년 두 사람의 합동 앨범 ‘우리사랑’을 제작할 때로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스튜디오에서 함께 녹음 중인 조영남씨와 패티김. 조씨는 1997년 두 사람의 합동 앨범 ‘우리사랑’을 제작할 때로 기억했다. [사진 조영남]

잠시만 참아주시라. 소위 도그쉣(개똥) 철학이라는 걸 잠시 풀고 싶어서 그런다. 무릇 인간은 상대를 찾아 싸움을 걸고 싸워서 이기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누구든 당신의 코를 내리쳐서 코피를 흘리는 걸 보고 싶어한다. 피보기를 좋아한다. 안 그런가? 여기에서 예외적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책을 읽고 영화관을 가는 일도 남의 피 흘리는 걸 보기 위해서다.

지난번 나는 중앙SUNDAY 담당자로부터 금년 말까지의 남은 연재 횟수를 휴대폰 문자를 통해 받아놓고 앞으로 또 뭘 쓰냐 걱정스러워 갑자기 누가 수필을 제일 잘 쓰는가, 나의 연재 중앙SUNDAY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무슨 스타일의 글 종류인가, 콩트인가 산문인가 다큐인가 수필인가, 다시 한번 살펴봤다. 내 연재의 멋진 피날레를 위해서 말이다. 결국 나는 내 글이 수필에 제일 가깝다는 결론을 냈다. 자! 그러면 이 세상에서 누가 수필을 제일 잘 썼는가. 답이 금방 나왔다. 몽테뉴다. 이름은 쭉 들어왔는데 한 줄도 뭘 썼는지 생각이 안 났다. 그래서 서점에 가 직접 구해 들고 대충 훑어봤다. 그냥 혼자 코피만 쏟았다. 아! 내가 이다지도 고전 철학에 무지했던가. 이건 내가 아는 수필류가 아니라 순전히 철학책이었다. 코피를 바가지로 쏟았다.

패티김의 가요계 은퇴에 맞춰 2012년 출간된 자서전 『그녀, 패티김』. 패티김의 구술을 조영남씨가 받아 썼다. [사진 조영남]

패티김의 가요계 은퇴에 맞춰 2012년 출간된 자서전 『그녀, 패티김』. 패티김의 구술을 조영남씨가 받아 썼다. [사진 조영남]

몽(몽테뉴)씨한테 덤볐다가 무참히 깨진 것이다. 이런 걸 자뻑 코피라고나 할까. 영어 때문에 혼피(혼자 피흘리다)했던 경험이 또 있다.

그걸 털어놔 보자. 그러다 보니 김연준 김장환 김동건, 공교롭게도 3김씨다. 또 다른 김씨, 연세대의 김동길 전 부총장님이 왕년에 ‘3김씨는 낚시나 가라’ 했던 말이 얼핏 떠올라 피식 웃었다. 다시 코피 얘기로 돌아가자.

누가 믿기나 할까. 이번 상대는 여자다. 이름은 김혜자, 영어 이름 패티김. 19세 때 미8군 쇼단에 가수로 입문하면서, 당시 최고의 히트송 ‘체인징 파트너’라는 노래를 하면서 세계적 초대박을 친 미국의 이미자 격인 패티 페이지의 이름을 따서 패티김으로 활약하게 된다.

패티김은 미8군 가수에서 일반 가수로 픽업되어 길옥윤 박춘석이라는 걸출한 작곡가를 만나 한국 가요계에 큰 별로 우뚝 서게 된다. 필자 또한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대학 2학년 때 패티와 똑같은 미8군 쇼단의 가수가 되고 이어서 ‘딜라일라’라는 엉뚱한 외국 노래로 일반 가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왜 엉뚱하냐. 나한테는 ‘사랑하는 마리아’의 길옥윤도 없었고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의 박춘석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외국 노래에 대충 우리말을 좀 섞어 그대로 불러 인정을 받은 케이스였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대단(?)한 건 패티김이 보유했던 그런 단골 전문 작곡가도 없이 맹탕으로 패티김과 거의 똑같은 대접을 받는 가수가 됐다는 것이다. 마구잡이 시대였다.

와! 내가 대학 초년생일 때 우연히 뉴코리아 호텔(요즘 시청 앞 플라자 호텔 옆쯤에 붙어 있던)에서 나오는 패티김과 길옥윤을 보고 너무너무 황홀해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 틈엔가 중요한 중앙 무대에 내가, 이 못생긴 조영남이가 패티김 바로 옆에 서 있게 됐으니, 상상을 해보시라!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빌리 그레이엄 팀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있을 즈음 그때 패티김이 미주 뉴욕 한인회 초청으로 뉴욕 공연을 할 때였고 미국에 와 있던 조영남이가 게스트 가수로 초청을 받게 된 거다. 당시는 달랐다. 한국 미국 간 비행기 요금이 굉장히 비싼 것으로 여겨질 때였다. 그때는 한국인들이 막 뉴욕으로 가서 자리 잡기 시작할 때라 자체 악단이 구성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천상 미국 악단을 불러 연습을 통해 노래를 맞추는 방법밖엔 도리가 없었다. 내 경우는 그나마 내 스스로 통기타나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소화할 수 있었지만 악기가 연주가 안 되는 패티김으로선 미국 자체 악단의 협조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려움이 컸다. 당연히 미국 악사들의 실력이 좋다 해도 한국 대중가요의 맛을 제대로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악보는 있기 때문에 나 같았으면 노래의 맛이고 뭐고 그냥 대충 해치우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습에 들어가서 뭐라 뭐라 패티가 지휘자에게 어필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 처음 왔기 때문에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남의 나라 말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건 무슨 시비나 비하가 아니라 요즘도 미국에 가면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영어 없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패티김은 연습 중 스톱(나도 스톱의 뜻만은 알 때였다)을 시킨 다음 틀림없는 영어로 음악적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와! 나의 놀라움! 우리한테도 미국인한테 원어로 의사를 표명하는 가수가 있다는 자부감, 뿌듯한 만족감! 그런데 분위기가 점점 예민해져 갔다. 패티김의 성에 차지 않는 모양새였다. 패티김의 언사가 점점 커갔고 지휘자의 답변도 이번엔 짜증 조로 나왔다. 와아! 패티김과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급기야 싸우는 것이었다. 미국 땅에서 말이다. 영어로 말이다. 더욱 놀라운 건 서로 길게 싸우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햄버거 주문도 제대로 못 하는 영어 실력인데 영어로 일반 대화가 아닌 싸움을 하다니. 나는 스스로 바보 멍청이 하면서 혼피, 혼자서 코피를 쏟아냈다. 김연준 김장환 김동건에 이어 또 ‘졌다’ ‘망했다’였다. 내가 시비를 걸거나 싸움을 건 것도 아니고 그냥 패티김한테 나혼자서 제풀에 완패한 경우다.

뉴욕뿐이 아니었다. 나는 가수 생활을 하는 내내, 패티김이 은퇴한 2013년까지 내내 지속적으로 눌려 살았다. 나만 속으로 앓고 끙끙댔던 일이다. 이런 거다. 사람들이 나를 발견한다. 반갑게 내 쪽으로 다가선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한결같다. “저는 우리나라에서 패티김과 조영남을 제일 좋아해요.” 심지어는 “저의 어머니가 패티김과 조영남을 제일 좋아해요” 한다. 옆에 패티김이 없는데도 그런다. 그건 또 약과다. 참을 만하다. 어떤 때는 사람이 내 쪽으로 달려오면서 소리친다. “어머! 조용필씨.” 이런 상태에서 예의를 갖추어 얘기를 해나가야 하는 나의 비겁한 느낌이라니. 그런데 말이다.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패티김이 내 집에를 일부러 대여섯 차례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누가 그걸 믿기나 할까.

자서전 대필 위해 집으로 몇 번 오기도

패티김, 조영남

패티김, 조영남

어느 날 패티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얘! 영남아.” “어쩐 일이에요. 누님.”

“내가 냉면 한 그릇 살게 나와.” 그래서 종로 근처 냉면집으로 나갔다. 냉면 두 그릇을 시키고 나서 내가 들은 용건은 이런 거였다.

“얘! 내가 은퇴를 하잖니.”

패티김과 이미자 누님들의 특징은 말이 굉장히 느리다는 것이다.

“그래서요.” “얘! 우리 회사에서 상의를 했는데 내가 은퇴를 하기 전에 자서전 한 권을 남겨야 한다는 거야.”

“좋지요.” “그래서 우리가 회의를 하지 않았겠니. 그럼 누구를 필자로 선정할까. 며칠간 고민고민하다가 결론 났어. 모두가 영남이 너한테 부탁하는 게 제일이래.” 이렇게 해서 패티 누님은 초고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 청담동 집에 자전적 얘기들을 구술하기 위해 방문하기로 결정됐다. 각각 챕터를 나누어 몇 주간 오시기로 약속을 했고 결국 약속은 지켜졌다.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건 대한민국 가수 중에 무시무시한 패티김한테 ‘누이’라는 호칭을 쓰는 가수가 누가 있으며 대한민국 현대 가요사의 전설로 굳어진 패티김 당사자로부터 직접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인생의 흥망성쇠 이야기, 한국 남자와 외국 남자와 결혼한 이야기, 사업의 성공과 실패 이야기들을 둘이서 마주 앉아 직접 들어본 연예인이 나 말고 누가 있겠는가. 이건 결단코 자랑이 아니다. 실화일 뿐이다.

미국말 싸움으로 나를 완전히 코피 흘리게 만들었던 패티김. 그럼 패티김이 코피의 끝이냐. 아니다. 또 있다.

욕을 또 바가지로 먹겠지만 또 있다. 앞의 3김씨와는 맞장을 직접 뜬 것이었고 뒤의 패티김의 영어 실력에 기가 팍 죽었던 게 나 혼자만의 혼피였다. 납작한 내 코에서 웬 피가 그리도 많이 흘러나오지.

2021년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미나리’라는 영화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한국 여배우의 수상 기념 스피치라니. 그것도 영어로! 아! 내 코가 워낙 납작해서 이젠 나올 피도 없을 듯하다. 제길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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