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김장환 목사 "왜 조영남 같은 딴따라와 친하냐고 쑤군대"

중앙일보

입력 2021.09.11 00:10

업데이트 2021.09.11 07:03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28〉싸움 건 두 사람

나한테 물어봐 달라. 요즘 무슨 맛에 사냐고 말이다. 지금 당장 대답하겠다. 별것 아니다. 요즘 나는 TV 뉴스 보는 맛에 산다. 나는 그걸 널리 알리고 싶다. 그게 무슨 개 풀 뜯는 소리냐고? 글쎄 나이 탓인가. 그런데 뭣이 그렇게 재밌냐고? 최근 선거판 돌아가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참고로 미리 말하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정치색이 없다. 여도 아니고 야도 아니다. 친한 친구 선후배들이 공평하게 분포돼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에 쏠려선 안 된다는 게 오래된 생각이다. 뉴스에 보면 아군 적군 불문하고 서로 물어뜯으며 물러나라 자퇴하라 자수하라 한도 끝도 없이 싸움판을 벌인다. 물론 따스한 뉴스가 대부분이지만 사이사이에 틈틈이 싸운다. 학교 다닐 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귀가 아프게 듣고 배웠으련만 어른이 된 선거판에선 완전히 다르다. 그것도 전 국민이 훤히 보게 되는 TV 뉴스 앞에서 애국애족이라는 묘한 제목으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싸운다.

이쯤에서 내가 한 가지 건의를 하겠다. 우리끼리 한 번 싸워보자. 지금부턴 아예 중앙SUNDAY 독자님들과 필자와 대화 방식으로 싸우는 거다. 먼저 귀하께서 저한테 시비를 걸어주시라. 자! 시~작!

김 목사,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에 당선

조영남씨와 김장환 목사. 100만 명이 운집한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광장 부흥집회 때 김 목사는 통역을 하고 조씨는 성가를 불렀다.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와 김장환 목사. 100만 명이 운집한 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여의도광장 부흥집회 때 김 목사는 통역을 하고 조씨는 성가를 불렀다. [사진 조영남]

그런 제안을 하는 당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싸워본 적이 있기는 한가?

싸워봤다.

몇 번이나 싸웠나 실토하라. 조사하면 다 나온다.

크게 두 번쯤 싸웠던 것 같다.

누구와 왜 싸웠는가.

내가 전 국민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 내가 어쭙잖게 일본에 대해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게 싸움의 불씨였다. 2005년 책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만의 친일선언』 사건 말이다.

결과는 어땠는가.

나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작살이 났다. 하루아침에 내가 이완용의 동생쯤으로 돌변했다. 그 결과 약 2년쯤 짐을 싸서 귀양 가야 했다. 유배 생활했다.

그거에 대해 뭐 할 말이 있는가.

없다. 뭣도 모르면서 잘난척하면 깨진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두 번째 싸움은 뭔가.

두 번째도 거창했다. 나는 지금 잔뜩 쫄아서 진술하고 있다. 대한민국 법무부가 나한테 싸움을 걸어온 건데 이건 현대미술의 개념에 대한 싸움이었다. 내가 조수를 고용해 그림 그린 걸 고객한테 알리지도 않고(법률용어로 ‘고지’) 팔아먹는 사기를 쳤다는 문제로 장장 5년간이나 옥신각신 싸웠다. 싸움의 결과는 어땠나. 아시다시피 나의 완승이었다. 2승 1패로 내가 이겼다. 휴!

질문이 또 있다.

질문해봐라. 나는 떳떳하다.

그럼 당신은 평생 두 번의 싸움으로 싸움은 완전히 끝을 냈다는 건가.

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라. 뒤를 좀 돌아봐야겠다. 나는 지금 77세다. 80세가 내일모레다. 눈도 희끄무레해지고 기억장치도 가물가물 몸과 정신이 어쩔 수 없이 어눌해졌다. 생각해보니 두 번 정도 털어놓을 만한 싸움을 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누구와 싸웠는가. 싸움의 상대가 누구였나.

내가 싸웠던 상대의 이름을 대면 독자님들도 오잉? 하며 깜놀(깜짝 놀라다의 준말)할 것이다. 국내적인 싸움도 아니고 세계적인 싸움도 아니고 이건 그냥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시비를 건 케이스다.

상대의 이름부터 대라.

이름은 김연준이다. 한양공대(옛날엔 그렇게 불렀다) 설립자이시자 작곡가다.

뭐라고?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 작곡가라고?

그렇다. 작곡가다. 심각한 작곡가다. 무려 3000곡 이상을 썼다. 그 유명한 ‘나는 수우풀 우거진’으로 나가는 ‘청산에 살리라’가 바로 김연준 작곡이다. 1972년 그가 운영하던 대한일보사가 수재의연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로 두 달간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작곡한 노래다. 한국의 MIT 같은 공과대학에 음대를 만들고 최초로 음악 콩쿠르를 만들어 나 같은 사람이 전국 고등학생 음악 콩쿠르 성악부에 당당 1위를 차지하며 전 장학생으로 한양음대 성악과에 입학하게 만든 장본인. 내가 고2 때부터 등록금은 물론 성악 레슨비까지 대주었던 분이 바로 김연준 총장이시다. 나는 학교를 잘 다니다가 약혼자가 있는 1년 후배 여학생과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한양대를 사직(?)하고 서울대로 옮겨간 것이다. 요즘 말로 배신을 때린 것이다.

어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나는 어느덧 유명가수가 되었고 김 총장님과는 다시 친하게 되고 우린 그때 명지대 설립자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유상근 총장님과 한패가 되어 수원중앙침례교회를 이따금씩 주일 예배차 방문하게 되었다. 그 교회엔 그야말로 세계적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여의도 부흥 집회에 통역을 맡았던 김장환 목사님이 시무를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를 마치면 으레 김 목사님의 인도로 무슨 골프장 식당엘 가서 냉면을 함께 먹곤 했다. 그게 일정한 코스였다.

알았다. 그럼 김 총장과 싸움은 언제 어떤 이유로 펼쳐졌나?

바로 사이좋게 냉면을 먹는 자리에서였다. 싸움의 동기는 매번 냉면값을 김 목사님이 치르는 것이었다. 김 총장이나 유 총장이 김 목사님보다 훨씬 경제적 여유가 있어 뵀는데 냉면값은 매번 김 목사님이 지불하는 걸 보고 냉면 맛이 영 껄쩍지근해졌다. 당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장안에 부자 중에서 소문난 부자가 바로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다. 현금 동원력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큰맘을 먹고 어필을 했다. 시비를 걸었다. 싸움을 건 것이다. 이런 식이었다.

총장님.

왜 그러나 조군.

저 총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서 말해 보게나. 조군.

저는 김 총장님처럼 살진 않겠습니다. 총장님은 김 목사님보다 돈이 훨씬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냉면값은 매번 김 목사님이 내십니다. (그때 나는 총장님이 교회 헌금을 왕창 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안색이 변할 것 같은데 김 총장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다)

김 총장 ‘청산에 살리라’ 등 3000곡 작곡

조군! 아주 좋은 얘기야. 그럼 조군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저는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을 죽기 전에 다 쓰고 죽겠습니다.

알았네. 조군은 지금 벌어놓은 돈이 얼마큼 되나.

집, 뭐 이런 거 저런 거 합해서 5000만원(그때는 큰돈이었다)쯤 됩니다.

잘했군. 내가 좋은 방법을 하나 가르쳐주겠네.

그게 뭡니까.

자네가 벌어놓은 돈을 내일 아침 몽땅 기부하게. 우리 한양 재단으로 말일세. 내가 한양대 신문에 대서특필해주겠네.

싸움은 거기서 끝났다. 게임이 끝난 것이다. 이 싸움에서 나는 최상의 교훈 하나를 건졌다. 그게 무엇이냐. 남 앞에서 돈 얘기를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 교훈을 새겨둔 지 30여 년 만에 나는 돈 얘기를 함부로 했다가 순식간에 알거지가 될 뻔했다. 미술 작품 대작 사건 때 내 그림이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몽땅 가져오라고 했다가 실제로 환불요청이 물밀듯 밀려들어 와 집만 남기고 몽땅 뺏겼다. 이때 웃기는 일이 있다.

뭐냐 말해봐라.

중앙SUNDAY 독자님께만 털어놓겠다. 그때 내가 기자(여기자였다)와 환불 얘기를 하면서 “재판 끝나고”라는 전제만 달았어도 이런 비극은 안 생기는 건데 나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입방정 때문에 식겁했던 거다.

좀 전에 두 번의 싸움 경험이 있다고 들었는데 두 번째 싸움의 상대는 누구인가.

말하기도 창피하다. 부끄럽다. 쪽팔린다는 얘기다.

누구인데 그렇게 창피하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내 싸움의 상대가 바로 나를 미국까지 비행기로 데려가 미국 문물을 익히게 만들어주고 공부까지 떠맡아주신 냉면값 잘 내셨던 지금은 극동방송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님이시다. 잘 아시겠지만 미국은 온통 침례교 국가다. 미국을 가봐야 김 목사님의 진가를 알 수가 있다.

한양대 설립자인 고 김연준(1914~2008). 작곡가로서 ‘청산에 살리라’ 등 3000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중앙포토]

한양대 설립자인 고 김연준(1914~2008). 작곡가로서 ‘청산에 살리라’ 등 3000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중앙포토]

내가 미국엘 갔을 땐 김 목사님의 빌리 그레이엄 부흥 목사의 통역으로, 화려하고 능숙한 말 그대로 신들린 듯한 통역으로(그냥 봐도 그랬다) 미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중 그는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침례교세계연맹(BWA) 총회장에 당선된다. 밥 존스라는 최고의 신학대학 때 학생회장이셨다.

그런데 왜 그런 은사님께 싸움을 걸었는가. 김연준 총장님도 당신의 은인이고. 당신은 참 인복이 많은 것 같다.

싸움은 김연준 총장님이 내 전 재산을 한양대에 기부하라고 하셨던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 내 눈엔, 내 생각에 김 목사님이 정치인이나 돈 많은 사람을 편애하는 것 같았다(미국 가서 알아낸 일이지만 빌리 목사님도 매번 대통령과 절친한 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큰맘 먹고 김장환 목사님한테 어필했다. 시비를 걸고 싸움판을 만들었다.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진주만 공격은 저리가라였다.

김 목사님!

왜 그러나 조 상병! (내가 빌리 그레이엄 부흥회에서 노래할 때가 바로 육군 상병일 때라 늘 나를 조 상병으로 부르시곤 했다)

목사님은 대통령을 비롯 정치하는 사람들과 돈 많은 사람을 너무 가까이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신 겁니까.

그렇게 싸움을 걸자 김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조 상병!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

“……?”

“왜 하필 조영남 같은 딴따라하고 친하게 지내냐고 한다네.”

“…….”

PS. 일찍이 내가 중앙SUNDAY 편집진에게 말해뒀다. 내가 글로 써서 신문에 발표할 수 있는 건 대략 60%쯤 될 거라고 말이다. 나머지 40%는 바로 내 삶의 실전에서 싸움을 벌였던 얘기들이다. 나도 살아 있고 상대도 살아 있기 때문에 차마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실제로 재미있는 싸움은 40% 안에 다 들어있다. 젠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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