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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머리로 싸우는 전쟁과 탈피오트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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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2001년 9·11사태를 계기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이 철수를 단행했다. 1975년 베트남전 패전으로 사이공 미 대사관 헬기 탈출의 치욕적인 악몽이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재현되었다. 1955년부터 20년간 이어진 전쟁의 패배로 베트남이 사회주의 정권이 된 것처럼 아프가니스탄도 미군 철수로 20년 만에 탈레반이 정권을 탈환했다.

뉴욕주립대의 역사사회학자 리처드 라크먼(Richard Lachmann)교수를 비롯한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미국의 전쟁 대처 전략과 능력에 의구심을 제기한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대학의 데이비드 킬컬런(David Kilcullen)교수는 『용과 뱀(Dragons and Snakes)』에서 전쟁 양상의 변화로 미국의 전쟁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분석한다.

뱀에게 지기만 하는 용의 전쟁
실패의 본질은 과거 의존 습성
이스라엘의 엘리트군 변신 전략
한국도 군조직 패러다임 바꿔야

정밀유도 미사일, 항공모함, 스텔스기 등 최첨단 대규모 무기체계가 용들의 전쟁에서는 유효할지 모르지만, 탈레반이나 알카에다 같은 뱀을 상대로 하는 비정규전에서는 효과가 없다. 스와스모어 칼리지 정치학과의 도미니크 티어니(Dominic Tierney)교수의 『The Right Way to Lose a War』나 아스펜연구소의 수석전략가 크리스 브로즈(Christian Brose)의 『The Kill Chain』에서도 미국의 전략 패러다임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국익을 위해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용들과의 전쟁만 준비하겠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핵 억지력으로 강대국간 전쟁보다 내전이나 테러의 전쟁만 일어났고 미국은 이 모든 전쟁에서 패했는데도 아직 미국의 전쟁 패러다임은 바뀌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 40년 가까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있다. 지식경영이론의 대가 노나카 이쿠지로(野中郁次郞) 히토츠바시대학 교수의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라는 책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해군 함포의 우월성과 청일전쟁에서 육군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레이더 기술을 개발한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함포를 자랑하던 야마토호는 전투에 몇 번 참전하지 못한 채 격침되고 말았다. 일본 육군도 노몬한, 과달카날 등 전투에서 기존의 의사결정, 전략, 조직운영 방식을 고집하다 모두 패전했다. 성공의 경험은 실패로 이끄는 유혹이다.

이스라엘도 1967년 6일 전쟁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가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으로 공군 전력 5분의 1을 잃고, 전쟁 발발 24시간 만에 무적의 탱크 300대 중 200대를 잃었다. 이후 패전의 통렬한 반성이 1979년 ‘탈피오트’라는 엘리트 군사교육 프로그램을 탄생시켰다. 제이슨 게위츠(Jason Gewirtz)가 쓴 『이스라엘 탈피오트의 비밀』은 이스라엘이 군대 패러다임을 바꾼 비결을 잘 보여준다.

이제 전쟁은 머리로 싸운다. 탈피오트 조직은 첨단무기 개발을 위해 뛰어난 고교 졸업생을 간부 후보생으로 모집하여 군 복무 중 3년 안에 학사학위를 취득하게 하고 5년간 추가 복무를 시킨다. 탈피오트는 견고한 산성, 최고 중의 최고라는 히브리어로 엘리트 리더십을 의미한다.

상위 5%의 지성, 창의력, 집중력, 인성을 가진 인재를 발굴하여 수학, 물리학, 컴퓨터 과학을 히브리대학 안에서 교육한다. 낙하산 훈련을 비롯한 군사훈련과 군사공학 교육도 철저하게 받는다. 부대 경험을 통해 군사기술 문제를 풀어내는 과제를 수행하여 전기통신 시스템, 인공위성 카메라, 사이버 방어 시스템, 미사일 요격 시스템 등에 관련된 최첨단 기술을 개발한다.

이스라엘에서는 탈피오트 부대원이 연예인보다 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무인정찰기, 로봇전투원, 드론 전투기, 무인 지상 차량 등 세계 최첨단 군사기술은 탈피오트 출신에 의해 개발된다. 1%의 리더가 나라를 살린다는 자부심으로 탈피오트 엘리트들은 군에서 개발한 최첨단 기술로 제대 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시장을 사로잡는다.

탈피오트 부대 출신들은 세계 최대 인터넷 방화벽 회사인 체크포인트와 같은 스타트업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핵심기술을 제공하는 모바일아이도 이들의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모바일 기기를 일시 정지시키는 에어패트롤,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하는 기술을 가진 아노비트, 새로운 레이더 기술을 활용한 웨이브즈 오디오 등 다양한 첨단기술의 스타트업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하고 있다. 그래서 탈피오트 출신들을 아이디어 머신이라고 부른다.

군대 내 폭력, 불량급식, 성추행, 노크 귀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군도 이제 패러다임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 세계 10위의 국방비와 60만 대군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모병제 논의와 함께 최첨단 군사기술을 개발하는 엘리트를 육성해야 한다. 군 복무를 허송세월이 아니라 제대 후 성공의 지름길로 만들어 군대에 가고 싶게 해야 한다. 몸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머리로 싸우는 전쟁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