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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세직의 이코노믹스

성장률 0%대 직면,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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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번 대선에 거는 국민의 기대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대통령 선거가 저만치서 다가오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국민이 가장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후보들이 지엽말단적인 문제만 갖고 논쟁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먹고사는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방안이 핵심 이슈가 되고, 선거 과정을 통해 그 해법이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현재 우리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는 심대한 위협에 처해 있다. 한국경제는 지난 30년간 ‘5년 1% 하락의 법칙’에 따라 우리 경제의 진짜 실력을 나타내는 장기성장률이 5년에 1%포인트씩 하락해왔다. 그 결과 차기 대통령 임기 중에 0%대 진입을 걱정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다.

장기성장률 5년마다 1%P 하락
좋은 일자리 줄고 소득분배 악화
선거 통해 ‘혁신의 길’ 되찾아야
국민 잠재력 일깨우는 후보 절실

만약 제로성장 시대에 접어들면 연간 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역성장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마이너스 10%에 이르는 매머드급 위기도 5%의 확률로 닥칠 수 있다. 여러 정권에 걸쳐 이루어진 과도한 경기부양의 누적으로 인해 금융위기에 처할 가능성도 있다. 청년은 물론 중장년을 위한 ‘좋은 일자리’가 더욱 고갈되고 2700만 근로자의 절반 이상이 매년 소득 감소를 경험하게 되면서 소득분배가 더욱 악화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위협적인 상황이지만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 선거를 통해 현재의 심각한 경제 상황이 공론화되고, 후보들이 그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이에 따른 해법을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현실화하면 우리에게 희망이 생긴다. 특히 후보들이 성장 추락을 저지할 명확한 방안을 제시해 잠자고 있던 우리 국민의 뛰어난 잠재력을 일깨우면 우리 경제는 다시 한번 힘찬 도약을 기할 수 있다.

다시 안 오는 ‘성장의 황금시대’

김세직의 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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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입장에서 볼 때 우리 국민의 잠재력은 놀랍고 대단하다. 필자가 ‘성장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1960년 초 이후 30년의 기간 동안 한국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던 8% 이상의 지속적인 장기성장률을 구가했다. 인구가 4000만~5000만 규모의 나라가 초고속 성장을 이렇게 장기간 유지한 적이 없다.

모방과 창조

모방과 창조

필자가 최근에 펴낸 『모방과 창조』에서 강조했듯이, 이런 까닭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루카스 시카고대 교수는 한국을 전무후무한 농구 수퍼스타 마이클 조던에 비유하기도 했다. 당시 경제학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한 한국을 설명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1980년대 말 내생적 성장이론이라는 새로운 경제학 이론까지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뛰어난 민족적 잠재력을 끄집어내 30년간의 ‘기적적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시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루카스와 현대 경제성장 이론가들이 발견한 한국 고도성장의 비법은 ‘인적자본’이다. 우리나라 근로자나 기업가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쌓아 둔 지식이나 기술을 의미하는 인적자본에 부단히 투자해왔다. 그리고 국민의 이러한 투자 잠재력을 효율적으로 끌어낸 ‘경제 체제’에 있었다.

경제체제가 경제성장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해졌다. 특히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해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공산주의 경제체제보다 ‘경제성장률 경쟁’에서 앞선다는 사실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은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 붕괴를 통해 여실히 증명됐다.

자본주의 체제 중에서도 당시 한국은 국민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스스로 생각해 내는 인적자본보다는 기존 지식이나 기술을 베끼고 외우는 모방형 인적자본을 빠르게 축적했다. 이 방식을 유도하는 강력한 교육, 조세 및 재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필자가 ‘모방형 자본주의 체제’라고 명명한 이 체제는 모방형 인적자본 투자에 대한 막대한 수익률을 보장했다. 이러한 인센티브로 인해 국민이 선진지식과 기술을 놀라운 속도로 열심히 외우고 베끼고, 이를 이용해 기업들이 빠르게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게 되면서 경제가 초고속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창조적 인적자본 키워내야  

그러나 나라의 경제체제가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성공에만 도취해 스스로 혁신하지 못하면 국민적 잠재력도 그 빛을 잃게 된다. 1990년대부터는 우리가 세계 기술 프런티어에 근접하게 됨에 따라 특허로 보호되는 외국 첨단기술을 베껴 쓰기가 더는 어렵게 됐다. 이와 함께 인터넷과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달로 모방형 인적자본의 가치가 급락했다. 이에 따라 개인이든 기업이든 스스로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능력인 ‘창조형 인적자본’을 키워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개발해내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그런데도 그 효능을 다한 모방형 자본주의 체제를 우리는 30년간 답습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는 100만불짜리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어도 보호받을 방법이 거의 없고, 어린 학생들은 인터넷에서 클릭 한 번이면 찾을 수 있는 쓸모없는 지식을 밤잠 못 자가며 암기해왔다.

5년 1%P 하락의 법칙

5년 1%P 하락의 법칙

그 결과 5년 1% 하락의 법칙에 따라 30년간 성장률이 추락해 이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이 무서운 법칙과 그에 따라 다가올 경제위기의 폭풍우를 저지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대적 과제에 당면하게 됐다.

다행히 그 해법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 해법은 바로 창조형 인적자본 투자를 촉진하는 ‘창조형 자본주의 체제’의 구축에 있다. 이 체제는 국민이 생각해 낸 창의적 아이디어에 대해 강력한 재산권 보장과 투자 인센티브 시스템을 제공하고 창조적 인적자본을 키우는 효율적 교육 시스템을 갖춘 자본주의 체제다.

한마디로 잠자던 국민의 창의적 잠재력을 끌어내 주는 체제이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창조적 잠재력은 산업화를 촉진하고 서민들과 중산층의 주거 안정에 크게 기여한 창의적 민족 발명품인 전세 제도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김세직의 이코노믹스’ 4월 13일 자)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 창조형 자본주의 체제로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구체적 방안이 모든 후보에 의해 경쟁적으로 제시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어떤 후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우리 국민의 뛰어난 창의적 잠재력이 폭발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고대한다. 그 결과 수많은 크고 작은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출현한다면 한국은 한때 전 세계가 놀라워한 ‘기적적 성장’을 다시 한번 구가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인은 유토피아를 판매하는 사람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정당은 국민에게 이상국가, 즉 ‘유토피아’를 판매하는 기업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정치인은 나름의 멋진 유토피아를 제시해 국민이 그 유토피아를 구매하고 싶게 만든다. 대통령 선거도 결국 서로 다른 유토피아를 판매하는 후보 간의 경쟁이다.

선거에서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선전하는 유토피아의 핵심에는 늘 ‘경제성장률’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적 의미의 유토피아에서는 국민이 행복하기 위해서 소비와 이에 따른 행복의 원천인 소득이 빨리 증가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빠른 소득증가 즉 ‘빠른 경제성장’은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선거에서 정치인들이 국민의 표를 유혹하기 위해 선전하는 마법의 묘약 같은 존재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제성장률 공약이 선거에서 종종 일등공신 역할까지 해왔다. 임기 중 장기성장률이 3%에 머무른 어떤 정부는 소위 ‘747’ 공약으로 7%대의 성장률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여 선거에서 이겼다. 역대 어느 정부나 실제 성장률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선거에서 이긴 정부가 얼마나 높은 경제성장률을 약속했는지와 상관없이, 한국의 장기성장률은 5년 1% 하락의 법칙에 따라 정권마다 전임 정권보다 1%포인트씩 하락해 왔다. 역대 정부는 선거 중 이 강력한 법칙을 깰 어떤 방안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그러니 공약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빠르게 성장해 좋은 일자리가 넘쳐나는 유토피아를 구매하고 싶은 국민은 그간의 경험을 교훈 삼아 이번 선거에서는 물건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5년 1% 하락의 법칙을 깨는 기능’이 들어 있는 제품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설명서에 그 기능이 들어 있다면 그 기능이 과연 제대로 작동할지 경제학적 원리에 비추어 확인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정과 통화량만 늘리는 방식으로는 혁신 부족과 규제 과잉 때문에 발생한 경기 침체를 절대로 탈피하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공약을 고를 때 소비자가 주의할 기본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