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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남북통신선 띄운 그때, 영변 핵시설 징후 알고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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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정부가 지난달 초부터 북한의 영변 핵시설 재가동 징후를 실시간으로 포착하고 있으면서도 같은 달 27일 남북 통신선 복구를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은 영변 원자로 재가동 움직임을 대놓고 드러내면서 '핵 시위'에 나섰는데 정부는 이는 거론하지 않은 채 통신선 홍보만을 부각해 남북 관계의 진전을 강조하려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북한 영변 핵시설의 상업위성사진. 38노스.

북한 영변 핵시설의 상업위성사진. 38노스.

"영변 재가동 정황, 이미 실시간 포착"

북한이 지난달 초부터 영변 핵시설에서 냉각수를 배출하는 등 핵시설 재가동에 들어갔다는 정황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 27일 작성한 북핵 동향 보고서를 통해 공개됐다. 외교부는 이에 대해 "긴밀한 한ㆍ미 공조 하에 북한 핵ㆍ미사일 활동을 지속 감시 중"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당국은 지난달 초부터 영변 핵시설 재가동 정황을 한ㆍ미 정보 자산을 통해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IAEA 보고서로 알려졌을 뿐 전혀 새로운 정보는 아니라는 취지다.

대북 정보 선택적 활용 논란

그런데도 정부는 지난달 27일 13개월만의 남북 통신선 복구를 발표하면서 향후 남북 대화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쏟아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통신선 복구 이튿날인 지난달 28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통신선 복원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개를 위한 가장 낮은 단계의 조치"라며 "남북 정상회담도 하나의 징검다리고 최종 목표는 비핵화"라고 말했다. 그런데 북한의 영변 원자로 재가동 징후는 비핵화에 역행하는 조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 27일 작성한 북핵 동향 보고서. 지난 7월부터 북한의 영변 원자로 재가동 징후가 포착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 캡쳐. 중앙포토.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 27일 작성한 북핵 동향 보고서. 지난 7월부터 북한의 영변 원자로 재가동 징후가 포착됐다는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 캡쳐. 중앙포토.

한미 연합훈련 연기 주장까지

관련 부처도 지원 사격에 나섰다. 통일부는 통신선 복원 사흘 뒤인 지난달 30일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 이후 중단됐던 민간단체의 대북 물자 반출 두 건을 10개월 만에 승인했다.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북한을 향한 사과 요구나 진상 규명 요구는 없었다. 이어 대북 취약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100억 원대 인도적 지원 사업 검토도 시작했다.

외교부도 지난 4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ㆍ미 국장급 협의 등 계기로 대화 조기 재개를 위한 후속 조치 및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 관련 논의를 가속화했다.

더 나아가 지난 1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한ㆍ미 연합훈련 중단 요구 전후로 정부ㆍ여당에선 '훈련을 연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통일부 고위당국자는 지난달 30일 기자들과 만나 "한ㆍ미 연합훈련을 연기하는게 바람직하다. 대북 관여를 본격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이어 지난 5일 범여권 국회의원 70여명은 훈련을 연기하자는 연판장을 돌리고 성명을 냈다. 모두 북한의 영변 원자로에서 연기가 나는 와중에 벌어진 일들이다.

남북이 통신연락선을 재가동한 지난달 27일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우리측 연락대표가 북측 연락대표와 통화하는 모습. 북한은 지난 10일 한ㆍ미 연합훈련에 반발하며 일방적으로 다시 통신선을 끊었다. 통일부 제공. 뉴스1.

남북이 통신연락선을 재가동한 지난달 27일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우리측 연락대표가 북측 연락대표와 통화하는 모습. 북한은 지난 10일 한ㆍ미 연합훈련에 반발하며 일방적으로 다시 통신선을 끊었다. 통일부 제공. 뉴스1.

"알면서도 유리한 정보만 공개"

전문가들은 북한이 2018년 9월 남북 평양공동선언을 통해 영변 핵시설 조건부 영구 폐기를 약속한 만큼 영변 재가동 징후는 남북 간 합의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공동선언 5조 2항에는 "북측은 미국이 6ㆍ12 북ㆍ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고 돼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영변 핵시설 재가동은) 남북 간 기존 합의 위반인데다, IAEA 수준의 권위 있는 기관에서 지적할 정도로 뚜렷한 동향이 포착됐는데, 정부가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입을 다문 것은 비판받을만 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북한과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대북 정보를 선택적으로 활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정부가 북핵 관련 동향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서도 북한과 대화 추진에 유리한 정보만 공개하고 있다"며 "북한 관련 정보를 선택적으로 활용해 여론을 유도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美 "대화ㆍ외교 필요성 강조"

이런 와중에도 미국을 방문 중인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29일(현지시간) 기자들과 만나 "여러 분야에서 북한과 인도적 협력이 가능하도록 패키지를 만들어가고자 미국 측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핵 동향 추적과 별개로 대북 인도적 지원과 관련해선 "가능한 분야에서 필요한 사전 준비를 해둔다"는 입장이다.

한편 같은 날 바이든 행정부 고위당국자는 북한의 영변 핵시설 재가동 징후에 대해 "IAEA 보고서에 대해 알고 있으며, 대화와 외교의 긴급한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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