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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홍범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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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유성운 문화팀 기자

홍범도 장군 유해 송환은 예기치 않은 논란에 부딪혔다. 좌우 양쪽에서 불거진 것은 그의 인생 행보 때문이다.

좌파 목소리를 내온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유해 송환은 권력자들의 합의일 뿐 홍 장군에 대한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여론은 무시됐다”고 지적했다. 우파 측에서는 그의 공산주의 전력, 특히 자유시 참변을 문제 삼는다. 1920년대 무장투쟁세력 중 사회주의 계열은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나뉘었다.

초반엔 민족주의 성향의 상해파가 우세했으나 차츰 소련 코민테른을 등에 업은 이르쿠츠크파가 장악해 나갔다. 양측의 갈등은 유혈사태로 번졌고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이때 홍범도는 이르쿠츠크파의 손을 들어줬고 반대파 처리 재판에도 참여했다.

역지사지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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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소련과 일본의 합의로 연해주 지역 독립투쟁세력의 무장해제가 결정되자 일부는 상해 임시정부 등으로 갔지만 홍범도는 소련에 남았고 공산당에 가입했다.

레닌은 그를 각별히 아껴 따로 불러 권총을 주기도 했고 홍범도는 지역사회 지도자가 됐다. 훗날 중앙아시아로 이주돼 극장지기로 쓸쓸한 삶을 살았다고 묘사되지만 넉넉한 연금과 보수를 받았고, 1941년 독·소전쟁 때는 젊은이들의 참전을 독려할 정도로 소련인으로 녹아들었다. 그가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는 건 누구의 시각일까. 신의주에서 태어나 공산당원이던 그는 ‘남한’에 모셔지고 싶었을까. 그의 유해 송환이 남북한 체제 경쟁의 산물은 아니냐는 지적도 터무니없지만은 않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