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공존의 새 유럽 추진/재편되는 국제질서(하나의 독일: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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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토 해체 거론되자 미 반발/통합 EC주축… 국가이기주의 극복이 과제
독일의 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소련의 경제난이었다.
악화의 길을 걸어오던 소련 국가경제는 대소군사력 우위를 내세운 레이건 미행정부와의 과다한 군비경쟁으로 극도로 피폐해졌다.
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군비경쟁을 과감히 포기하고 페레스트로이카와 신사고의 길을 택했다.
그 결과 동유럽의 민주개혁과 동서화해가 본격화됐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독일 국민들은 놓치지 않았다.
독일 통일을 최종 승인한 지난 12일 모스크바에서 있은 「2+4조약)체결 직후 드 메지에르 동독총리(외무장관겸임)는 『이제 전후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의 말처럼 독일의 통일로 미소를 양대 축으로 했던 전후 냉전시대는 이제 막을 내려가고 있다.
독일의 통일논의 전개과정에서 냉전시대를 대표하던 동서 양대군사블록,죽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바르샤바조약기구는 변화와 해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동유럽의 민주화와 가맹국들의 탈퇴 움직임,그리고 힘의 근간이던 소련군 철수 등으로 바르샤바조약기구는 이미 해체된 상태나 마찬가지다. 더이상 적이 없어진 나토도 종래의 전진방어개념을 수정하는 등 전략 및 구조개편에 착수했다.
독일의 분단에 기초했던 동서냉전체제는 독일의 통일과 함께 사실상 붕괴된 상태지만 이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체제나 질서는 아직 그 틀이 잡히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독일통일 이후의 국제질서는 대충 세가지 형태로 전망되고 있다.
첫째는 유럽 안보 협력회의(CSCE)를 기본으로 한 전유럽단일안보체제를 구성하는 방안이다. 이는 통일독일의 나토잔류로 힘의 열세가 분명해진 소련 및 동유럽국가들이 지지하는 방안으로 특히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하벨 체코대통령이 이에 적극적이다.
모든 유럽국가와 미국ㆍ캐나다 등 36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CSCE에 의한 단일안보체제는 고르바초프의 말처럼 『대서양에서 우랄산맥에 이르는 하나의 지붕』 아래 각국이 평화공존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동서냉전질서의 완전청산,즉 나토해체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은 이 방안에 반대하고 있다.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방안은 나토를 근간으로 하는 것으로 나토를 종래의 군사동맹에서 정치ㆍ경제동맹화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럽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잃지않겠다는 미국의 속셈이 깔려있다.
동서화해로 미군이 유럽에 주둔해야 했던 명분이 없어져가고 있는데다 통독과 92년말로 예정된 EC 통합으로 유럽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나토의 골격을 유지,종래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몰타 미소 정상회담 직후의 나토 정상회담 때 부시 미대통령이 「신대서양주의」 연설을 하면서 『미국은 유럽의 국가』라고 선언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프랑스나 서독 등 서유럽국가들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물론 나토를 유지해야 한다는데는 찬성하지만 이들은 통합 EC가 주축이 된 새로운 국제질서를 희망하고 있다.
즉 미국이 가입하고 있지 않은 EC의 통합을 경제분야뿐 아니라 정치ㆍ군사분야에까지 확대해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면서 EC의 입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 국제질서가 재편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으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어떠한 형태의 국제질서가 등장하더라도 이를 이끌 시대정신(Zeitgeist)은 국가상호간 협력증대에 의한 평화공존이란 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냉전종식을 주도한 고르바초프가 권좌에 계속 머무르면서 현재와 같은 국내외적 개혁ㆍ개방노선을 계속 추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한편 냉전체제 붕괴가 세계 평화정착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진전되리라고는 전망할 수 없다.
힘에 의한 동서 균형의 질서가 무너진 틈을 이용,민족주의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소수민족 분리독립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소련이나 통일을 달성한 독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한 동유럽 국가에서도 이런 징후들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기까지 상당기간 이 문제가 국가간 주요 이슈로 등장할 것이며 국가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공존을 위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베를린=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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