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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노 대통령 … 기회는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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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북한의 벼랑 끝 전술로 벼랑에 몰린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자초한 김정일은 어차피 벼랑에 설 각오를 하고 도발을 감행했다. 반면 그의 핵 야욕을 없애려면 북한을 코너로 몰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노 대통령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셈이 됐다. 그러니 '북한 핵실험=노 대통령의 실패'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여야 대표 간담회에서 핵실험을 "작은 문제"라고 했다. "포용정책이 핵실험을 가져왔다는 지적은 여유를 갖고 인과관계를 따져봤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실패를 인정하기 싫다는 얘기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국민이 그의 견해에 동조할까.

노 대통령에겐 현실감각이 필요하다. 자신이 김정일과 함께 벼랑 끝에 서게 됐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위기의 대통령'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탈출이 불가능하다. 맥도 모르고 침통(針筒)을 흔들면 병은 악화할 뿐이다.

노 대통령에겐 실패를 교정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 문제는 뭘 하느냐다. 역사는 길을 가르쳐 준다. 노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란 책도 썼다. 링컨이야말로 훌륭한 교사다.

링컨은 대통령 취임 뒤 노예 해방 문제와 관련해 상당 기간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예컨대 북부연합의 존 프레몬트 장군이 미주리주 모든 흑인의 해방을 명령하자 링컨은 그걸 즉각 취소하고 프레몬트를 해임했다. 노예제를 허용해 온 미주리가 프레몬트의 조치에 반발해 북부연합을 탈퇴하면 연방제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흑인과 노예해방론자들은 "링컨이 선거공약을 지키지 않고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링컨은 "공인인 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북부연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파괴하는 게 아니다"(뉴욕 트리뷴에 보낸 편지에서)며 정책의 우선순위가 연방제 유지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그에겐 신념보다 나라가 먼저였던 것이다. 링컨의 그런 애국심을 노 대통령은 존경한다고 책에 적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22, 24대 대통령을 지낸 그로버 클리블랜드도 좋은 모델이다. 민주당 소속이던 그는 노동자를 이해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노동조합을 합법화하고 노동부를 만들었다. 1886년 연두교서에선 노동 착취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그를 노동자들은 '친구'라 불렀다.

하지만 1894년 시카고에서 철도를 마비시키는 철도노조 파업이 발생하자 클리블랜드는 달라졌다. 대화가 통하지 않고 사태가 악화하자 "공인으로서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병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며 군대를 동원해 파업을 진압했다. 그런 그가 1908년 운명했을 때 내려진 평가는 "당파가 아닌 미국을 섬긴 대통령"(런던 모닝 포스트)이라는 찬사였다.

지금 노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건 링컨이나 클리블랜드가 보여준 것과 같은 행동이다. 위기 극복을 위해 코드와 소신까지 부정할 수 있는 용기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침묵을 깨고 북한이 놀랄 정도로 단호한 모습을 보일 순 없을까. "북한을 자극하면 한반도가 불안해진다"며 지레 겁먹지 말고 북한이 도리어 우리 눈치를 보게 할 수는 없는 걸까.

미국인 다수가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과 싸우면서 힘으로 평화를 일궈냈다. 북한과 소련이 같다고 할 순 없으나 레이건의 단호함은 결국 소련을 평화의 마당으로 나오게 했다. 여당에서도 눈총받는 신세인 노 대통령은 이제 잃을 건 별로 없지만 버릴 게 있다. 그건 오기와 코드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