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북진이 중국군개입 불렀다/영 자료서 밝혀진 6ㆍ25참전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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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주은래경고 무시 진격/미도 영 완충지대안 반대 “월경추격”통고
한국전에 중국이 어떻게 개입하게 됐느냐는데 대한 진상이 아직까지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당시 중국의 참전을 막기위해 영국이 막후에서 활발하게 중국과 접촉했던 사실이 영국외무부 자료등을 통해 밝혀졌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한국에 대한 서구의 개입(1950∼1954)」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계동박사(연대강사)가 영국의 공문기록보관소와 영국총리 회의록등에 수록된 자료를 발굴,중국의 개입과 영국의 중재과정등을 밝혀냈다. 당시 영국은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이것이 실현되지 않자 중국의 대규모 참전을 막기 위해 북위40도선에서 완충지대를 설치할 것등을 미국에 제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은 김박사의 논문중 중국참전부분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편집자주>
중국정부는 50년 9월초부터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경고성의 성명을 발표했다.
주은래는 필요하다면 25만명의 군대를 보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정부의 반복되는 이같은 경고를 인도와 영국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인도총리 네루는 영국의 베빈 외무장관에게 9월말 전문을 보내 확전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유엔군은 38선 이북으로 전진을 하지 말도록 제의했다.
이에 영국은 미국에 중국의 우려를 해소시켜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과소평가하고 중국의 경고를 허세로 간주,북한지역으로 진격해 북한군을 섬멸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50년 10월1일 한국군이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이 두려워한 것은 유엔군이 북진,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이냐는 점이었다.
이 당시 한국군에서의 영국목표는 북한군이 이미 많은 타격을 받았으므로 군사적인 방법보다는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합참본부는 유엔군이 북한군에 항복을 권고하면서 최소 7∼14일동안 38선에서 진격을 멈추어야 한다는 결의를 했다.
즉 북한군에 항복할 시간적 여유를 준후 북한군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38선을 넘되 이 경우도 북한을 영원히 점령할 의사는 없다는 점을 밝혀야 한다고 언명했다.
그러나 유엔은 10월7일 유엔군의 북진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맥아더는 10월9일 전면적인 북진을 감행했다.
미국은 당시 중국군이 참전기회를 놓쳤으며 만약 참전한다 하더라도 소규모로 제한적일 것으로 판단했다.
맥아더는 10월24일 유엔군이 한만국경근처로 진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제한을 해제하고 야전사령관들에게 최고의 속도로 압록강까지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유엔군과 중국군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됐다.
11월1일 미정보부는 중국군의 참전을 확인했으며 이는 국경의 안전과 만주에 전기를 공급하는 수풍발전소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중국의 한국전 참가가 기정사실화되자 영국의 정책목표는 어떻게 하면 전쟁을 제한시켜 타지역으로의 확산을 막느냐는 것이었다.
11월7일에 열린 영국합참회의에서 슬림육군참모총장은 중국이 참전한 것은 한반도에 완충지대를 설치하기 위한 것이므로 유엔군은 적당한 방어선을 구축,전선을 안정시킨후 협상토록 제안했다.
영국합참은 토의끝에 한반도에서 가장 잘록한 허리부분인 북위 40도선까지 유엔군이 철수하고 이 선에서 국경까지의 지역을 완충지대로 남겨두자고 결의했다.
중국도 대규모 전쟁을 피할 생각이 있다면 이 제안에 호의적으로 나올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의 이같은 생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책을 입안했다.
베빈영국 외무장관이 주미영국대사인 프랑크스에게 전문을 보내 완충지대안에 대한 미국의 의견을 타진토록 지시한 11월13일에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주영미국대사에게 정반대의 전문을 보냈다.
즉 압록강 이남에서 적대행위를 하고 만주지역으로 퇴각하는 적비행기를 유엔공군기가 2∼3분동안 만주지역으로 추격할 수 있는 월경추격권을 유엔군사령부에 부여해야 할 필요성을 통고한 것.
애치슨은 영국의 완충지대안은 서방측의 유약한 입장을 공산측에 보여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맥아더는 북한지역의 어느 일부분이라도 중국에 양보하는 것은 1938년 영국이 나치독일에 유화정책을 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세계에 최악의 패배감을 안겨주는 정책이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영국은 중국과 직접 접촉을 해 유엔군작전에 관해 중국이 품고 있는 위기감을 해소시킬 방안을 강구했다.
베빈 외무장관은 중국정부에 비망록을 보내 유엔군의 유일한 임무는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는 동시에 국경지역에서 한중양국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중국도 유엔을 협상창구로 활용할 뜻을 보이자 영국은 유엔군이 더이상 진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국합참은 이제 영국의 이같은 의사를 「가장 강력하고 명료하게」미국에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은 완충지대의 행정책임은 유엔한국위원회가 맡고 이 위원회는 남북한인들을 중심으로 하되 유엔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안을 유엔에 제출키로 했다.
그러나 완충지대안에 대한 미국의 반대는 여전했다.
베빈 외무장관은 완충지대안이 전쟁을 빠른 시일내에 종결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 반면 애치슨장관은 이 안이 유엔군에 재앙만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반박했다.
애치슨장관은 양보를 기초로 한 협상이 아니라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한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리스마스이전에 전쟁을 종결시키려 했던 맥아더는 11월24일 최후의 승리를 위한 총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25만명의 중국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은 다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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