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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길 뒤처지면 마구 사살(재조명 6ㆍ25: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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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아리 고개/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흔/「반동」몰아 41명 한구덩이서 학살 한실부락/억울한 희생 보상실마리 못찾아 거창학살/속초ㆍ고성 생이별 6만여명… 망향과 아픔의 40년
6ㆍ25 포성이 멎은지도 40여년이 지났지만 민족의 가슴에 남은 상흔은 지워지지 않은채 여전히 우리곁에 생생하기만 하다. 현대사의 거센 회오리 틈새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아직도 한의 매듭을 풀지 못한채 6ㆍ25 그날을 맞을때마다 아픔을 되새겨야 하고 전선이동으로 잠시 난리를 피해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40여년이 지난 오늘 실향민이란 이름으로 고향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다. 아물지 않은 6ㆍ25 상흔들을 찾아 그들의 한과 우리의 치유노력은 과연 어떠 했는지를 살펴본다.
◇장성군 한실부락=『죽창으로 찔러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 그것이 어디 사람짓이었다 하것소. 미친것이제. 뼈라도 찾아 묻어 불쌍한 원혼들을 달래야 할턴디 어렵게 살다보니 그러지도 못하고 40년이 갔어.』 마을주민 41명이 한구덩이에서 떼죽음을 당하는 광란의 학살 와중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김종만씨(72ㆍ전남장성군 서삼면 대덕리 한실부락)는 6ㆍ25 40돌을 맞아 처절했었던 그 당시의 인간사냥 참극에 새삼 몸서리치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들의 위령비 하나 세우지 못함을 몹시 가슴아파했다.
노령산맥 자락의 한적하고 조그만 산골 「한실부락」에 들어왔던 인민군은 빨치산 출신들을 앞세워 마을자위대등을 조직해 빨치산들에게 비협조적 이었던 이른바 「반동분자」들을 골라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김씨의 셋째형 종남씨(당시 45)와 형수ㆍ어린조카 5명 등 일가족 7명을 비롯,이 마을에서 반동으로 몰려 그해 8월17일부터 9월29일사이 학살당한 주민은 모두 41명으로 알려지고 있는데,9월29일 하루에만 무려 34명이 한꺼번에 살해됐다.
○반공교육장 바람직
『마을 앞산에 있는 일제때의 소나무기름을 짜던 송탄유구덩이로 사람들을 새끼줄로 줄줄이 묶어 끌고가 학살한후 흙으로 덮었다. 아마 어린아이들은 산채로 묻혀 죽은 수가 많았을 거여.』
김씨는 인민군과 폭도들이 고모집(장성군 북일면 성산리)에 숨겨두었던 김씨의 아홉살짜리 질녀까지 끌고와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치를 떨었다.
김씨도 자위대원들에게 잡혀 동네주민 2명과 함께 죽음의 송탄유구덩이로 끌려가다 탈출,전북 정읍에 사는 큰누나 집에서 숨어지내다 수복된후 3년만에 한실부락으로 돌아갔다.
『국군이 진주한후 송탄유구덩이를 파헤쳐 어른들의 시체만 대충 수습해 장례를 지내고 어린애들은 그곳에 그냥 묻어버렸다고 들었다. 그것이 맘에 걸려 송탄유구덩이 자리에 합동묘라도 쓰고 조그만 위령비를 세웠으면 좋겠는디 힘이 닿아야제.』
김씨는 송탄유구덩이가 조촐하게나마 정화되고 위령비라도 세워져 그날의 참상을 길이 알리는 반공교육장화됐으면 한이 없겠다고 바랐다.
전남의 대표적인 산악지대인 장성지방에는 한실부락외에도 인민군등에 의한 집단학살극이 벌어진 곳이 많다.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신평마을도 그 한곳. 창녕조씨 집성촌으로 천석꾼 집안이었던 조씨 종가등 5가구 50여명이 마을 앞산 도룡굴에서 학살돼 세곳의 구덩이에 묻혔으나 수복후 어른들 시체만 수습했을 뿐 어린이들은 학살의 현장에 원혼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51년 2월10,11일 2일간에 걸쳐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7백59명의 양민들이 공산게릴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국군들에게 몰죽음을 당한 이른바 거창사건은 최근 광주사태와 함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 및 피해보상문제가 정치쟁점화되고 있으나 해결전망이 불투명해 유족들의 아픔을 더해주고 있다.
○신원확인 7백여명
신원면 부근은 6ㆍ25 개전직후부터 지형적 여건을 활용한 공산게릴라들이 출몰하기 시작해 전쟁막바지까지 버텼고 50년 12월부터 2개월 가량 빨치산이 지배했던 곳이다.
당시 공비토벌에 나섰던 국군이 이곳에서 40여명의 전사자와 1백여명의 부상자를 내자 이것은 신원면 주민들이 공비들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주민들을 율원국민학교에 모이게 한후 인근 계곡에서 집단 사살해 버렸다.
거창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에 따르면 이 사건의 사망자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이 7백19명,미확인자가 40명이나 된다.
특히 희생자들 가운데 3세이하 젖먹이가 1백19명,4∼10세 1백91명,11∼14세 68명 등 14세이하 어린이만 3백78명이고 60세이상에서 최고 92세 노인도 70명이나 됐다는 사실에서 14세 이하까지도 어른들의 사상놀음 앞에 희생돼야 했던 비극과 무분별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저지른 극심했던 횡포의 한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이 사건은 51년 5월 자유당 정부가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을 해임시키고 학살주역들을 군법회의에 회부,대부분 중형을 언도하는 선에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그후 5ㆍ16 군사정권은 합동분묘마저 파헤치고 60년 11월18일 도비와 주민성금으로 건립했던 위령비마저 61년 6월15일 비문을 알 수 없도록 파손해 파묻어버리는 등 진상을 의도적으로 은폐해 버렸다.
그러나 88년 부활된 국정감사를 계기로 유족들에 의해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대책이 거론되기 시작,거창사건관련 특별법안이 지난 2월 국회에 상정되기까지 했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강원도 실향민촌=『곧 돌아가리라 믿었는데 벌써 40년이 흘렀으니…. 죽기전에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고향땅을 다시 밟아볼 수 있을지.』
실향민 조일랑옹(78ㆍ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600).
여든을 바라보는 백발의 인생여정속에 망향의 아픔을 묻은채 살아온 조옹의 눈엔 회한의 눈물이 맺혔다.
6ㆍ25만 되면 가슴이 뭉쳐 있는 망향의 한이 더욱 복받쳐진다며 목메어하는 백발의 모습에서 1천만 실향민의 아픔은 결코 아물지 않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조옹이 함남 북청군 신창읍 토성리 고향을 떠나 월남한 것은 39세때인 51년 「1ㆍ4후퇴」때.
잠시 피난하는 기분으로 조부모와 양친,부인과 3자녀 등을 남겨둔채 단신 월남한게 생이별길이 되고 말았다.
○고향 가까운 곳 정착
그래서 조옹은 고향에 한발치라도 가까운 속초에 정착,통일의 염원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같은 간절한 소망은 동해안 최북단 속초ㆍ고성지역에 사는 6만여 실향민들은 똑같은 바람이다.
특히 속초시 청호동 속칭 「아바이 마을」은 전체 1천1백70가구 4천9백여명의 주민중 70%가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로 40여년간 고향풍습과 언어를 그대로 간직한채 오직 귀향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 어업이 생업인 「아바이」들은 정착당시 허허벌판에다 레이션박스와 판자벽을 치고 루핑으로 덮어 지은 움집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억척스럽게 저축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다.
함남 영흥이 고향인 윤덕훈씨(77)는 『실향민이면 누구나 피난살림의 육체적 고초는 감내할 수 있어도 고향그리움은 참지 못한다』며 『이제는 잘사는 것보다 오로지 귀향에 대한 염원뿐』이라고 했다.
◇미아리고개=40년의 세월이 흐르며 당시의 상흔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서울시내에서 서울의 최후방어선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미아리고개.
○산마다 시체 즐비
서울이 점령된지 3개월뒤인 9ㆍ28수복때 북으로 쫓겨가던 인민군들이 많은 애국지사를 끌고가며 뒤처진 사람들을 지금의 성신여대 뒷산에서 학살하고 끌려간 인사들은 돌아오지 않아 「한많은 미아리 고개」로 불려지고 있는 곳.
『끌려가던 사람들이 하도 많아 어림잡아 헤아릴 수도 없었지요. 손목을 묶은 쇠사슬이 모자라 소끌던 밧줄로 엮어 끌고갔고 뒤처진 사람들은 포탄이 떨어진 구덩이에 집단으로 몰아넣고 학살해 부근의 산마다 시체들이 즐비했었지요.』
경복고 2년 재학때 6ㆍ25를 겪은 하재권씨(66ㆍ무직ㆍ서울보문동)는 당시의 처절했던 현장을 아직도 잊지못한채 몸서리친다.
이제 그 단장의 고개는 주택가로 변해 기억속에서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지만 위령탑 하나없이 역사의 장속에 묻혀 있다. 어렴풋이 비극의 역사를 전하는 서울시는 뒤늦게나마 이곳에 위령탑을 세우는 등 공원조성계획을 마련하고 있다.
서울=김종혁기자
속초=권혁룡기자
장성=임광희기자
거창=허상천기자PN JAD
PD 19900621
PG 05
PQ 02
CP HS
CK 08
CS A10
BL 1956
GI 이만훈
GI 최훈
TI “사회의 무관심이 서러워요”/상이군경ㆍ전쟁미망인
TX ◎보훈 미흡… 대부분이 생활고/나라위한 비극의 주인공… 과감한 지원 아쉬워
전쟁이 남긴 상흔은 상이군경을 비롯한 전쟁미망인ㆍ유가족 등에게 가장 깊다.
전후 이 사회가 최우선 과제로 해결했어야할 문제가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 이들은 사회의 냉대와 그늘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이 꼴이 된 것을 누가 알아나 줍니까. 팔 병신이 돼 막노동을 하려해도 하지도 못할뿐더러 받아주지도 않아 가족들에게 짐만 된다싶어 서너번이나 몰래 죽으려했던 적도 있습니다.』
2급 상이용사인 황종화씨(60ㆍ서울 동선1동)는 전쟁이 터진지 7일만인 50년 7월2일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입대.
이듬해 10월12일 경기도 연천ㆍ전곡지구 전투에 참석중 인민군이 쏜 105㎜ 포탄에 맞아 오른손 불구가 됐다. 20세에 입대해 북진때는 맨발로 평양까지 진격하기도 했던 황씨는 53년 11월 중순 명예제대후 부산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형한테로 가 옷행상을 한 것을 시작으로 2남3녀를 키우느라 안해본 일이 없다.
6ㆍ25 전쟁당시 부상당한 상이군인은 71만여명. 이중 현재 보훈처에 등록돼 있는 상이군인(경찰포함)은 4만5천여명이다.
이들은 현재 보훈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은 장기입원환자 70여명을 포함,1백40명이나 된다.
상이군경들은 현재 1급부터 9등급으로 분류돼 매월 최하 15만원에서 최고 69만7천원(1급1항 해당자의 경우 기본연금 15만원에 부가연금 35만5천원,간호수당 19만2천원을 합친 금액)씩을 받고 있다. 61년부터 좀 나아진 금액이다.
61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국가적 보훈정책에 따라 설립된 서울 신대방동 재활용사촌 박연규회장(58)은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자립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개촌당시 78명이었던 회원이 현재 생존자 45명과 19명의 유가족 회원 등 모두 64가구 2백여명이 모여 살고 있는 재활촌은 회원모두가 전쟁중 척추장애를 입은 상이용사들이다. 이들은 군용양말과 봉투ㆍ전산용지 등을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연간 60억원씩의 매출을 올려 이익금으로 회원가구당 월 50만원씩을 보조해 어렵게 자립의 길을 걷고 있다.
이같은 상이용사촌은 서울에 9개소등 전국에 25개소가 운영되고 있을뿐 그나마 이같은 혜택을 보지 못하는 상이군경들은 생계대책이 막연,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6ㆍ25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거나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도 아직까지 너무 크다.
6ㆍ25 전쟁의 전몰군경 미망인은 현재 파악된 생존자가 2만4천1백명. 이들의 평균연령은 63세로 대부분 전쟁발발당시 20대초반의 신혼주부들이었다.
전쟁으로 신혼의 단꿈이 깨진 것은 물론 40여년을 홀로 자녀들을 키우느라 그야 말로 뼛골이 빠진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고 하도 기가막혀 눈물도 안나옵디다.』
지난 11일 전몰군경 미망인회로부터 장한어머니상을 탄 이매영여사(62ㆍ서울 정릉1동)는 42년 남편 우동식과 결혼,홀시어머니를 모시고 큰아들과 함께 충북 중원군에서 농사일을 하며 살던중 6ㆍ25 전쟁으로 입대한 남편이 52년 오성산전투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했을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고통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여사는 남편을 대신해 두아들 뒷바라지에 손톱이 다닳도록 낮에는 농사일,밤에는 삯바느질 등으로 평생을 보내다시피 했다.
이들 전쟁미망인들은 62년 보훈정책이 실시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모두 합쳐 국가로부터 1인당 고작 4백93만7천원을 보조받았을 뿐이다.
이것도 그나마 지난해 11월부터 보상금이 월 15만원으로 올라 형편이 조금 나아진 것이다.
『보상금을 월 30만원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최근 광주보상법이 논의되면서 유가족들에게 3억원씩 지급한다는 소리가 들릴때마다 과연 국가는 우리 미망인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40년 세월동안 망각의 뒤안길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온 한 전쟁미망인의 소리에 우리 모두가 자성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이만훈ㆍ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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