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CSI 만든다… 혈흔 등 국과수 도움 없이 독자 감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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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살인사건 현장에서 20여 개의 머리카락이 발견됐다. 경찰은 이 머리카락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감식을 의뢰했다. 하지만 국과수는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어 머리카락의 DNA 검사를 마치는 데 보름 이상이나 걸렸다. 수사팀은 감식 결과가 나올 때까지 뾰족한 단서를 찾지 못한 채 허송세월을 보냈다'.

강력 사건이 터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전망이다.

일선 경찰에 범죄 증거물 분석을 담당하는 한국판 'CSI(Crime Scene Investigation.범죄현장수사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경찰청은 다음달 초 서울지방경찰청에 '다기능 현장증거 분석실'을 설치한다고 10일 밝혔다.

이 분석실은 검시.화재감식.범죄분석에서 확보된 증거물을 분석.감정.분류하며 범죄기법 연구, 범죄정보 통합관리, 감식기법 개발을 맡는다. 이를 위해 경찰은 2억원의 예산을 들여 고배율 현미경.일산화탄소 측정기.원심분리기.성분분석기 등 첨단 과학수사 실험장비를 마련할 계획이다. 검시관 13명과 범죄분석 요원(프로파일러) 10명도 배치키로 했다.

분석실이 운영될 경우 지문.발자국 등 기초적 감식부터 혈흔.미세먼지.섬유질 등 증거물 감식까지 가능하게 된다.

지금까지 경찰은 각각 지방경찰청에 과학수사계를, 일선 경찰서엔 과학수사팀을 두고 범죄현장 감식을 했다. 그러나 장비와 인력이 부족해 현장에서 채취한 증거물은 모두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내지는 게 보통이다. 국과수에 일이 몰리면 감식이 늦어져 수사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신설되는 분석실은 범죄의 지능화와 무동기성 범죄의 증가에 대비하기 위해 범죄심리와 행동증거 분석에도 인력과 장비를 강화할 예정이다.

경찰은 올 4월 검거된 서남부 연쇄살인범 정남규(37)를 잡는 데 애를 먹었다. 정씨가 가정집에 침입해 사람을 죽인 뒤 불을 질러 현장증거를 상당히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핏자국의 형태와 방마다 뒤진 행동패턴, 증거인멸을 위한 방화 등 수법을 분석해 수사선상을 좁혀가 정씨를 체포할 수 있었다.

경찰청은 서울청의 성과를 보고 분석실을 전국 지방청으로 확대 설치할 방침이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선 일선 경찰서에 과학수사 분석실을 갖추고 있다.

이철재 기자

◆ CSI=Crime Scene Investigation의 약자. 경찰의 범죄현장수사팀을 일컫는다. 미국에선 일선 경찰서마다 배치돼 범행 현장에서 최첨단 과학수사 장비로 범죄단서와 범인을 추적한다. 미국 CBS방송이 CSI의 활약상을 소재로 한 드라마 시리즈를 만들면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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