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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양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최근 한시전문지가 기획한 우리 시의 정체성(아이덴티티)을 추구하는 자리에서 시단의 대선배 한분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다가 그만 슴이 뜨끔한 적이 있었다.
그 기획자체가 요즈음 우리 시의 다양한 흐름과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대량생산의 현상을이른바 「폴리포니」라는 러시아형식주의의 용어로 긍정적인 수용을 하기보다는 그 혼류와 무잡성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새로운 길놓기를 해보자는 근원적 치유의 것이어서 자못 긴장되었던 탓도 있었으나, 그 대선배의 한숨 섞인 자조적인 토로가 예사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사실이었다.
그 대선배는 한 시대의 가장 예리한 감성과 정신의 깊이가 조형해 내는 시라는 창조물들이 쓰레기통을 넘치게 하는 또 하나의 공해물로 간주된다면 이건 얼마나 슬픈 일이냐고 했다. 아니, 이건 슬프다기 보다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했다. 사업의 폐기물보다도 정신의 폐기물이라는 것은 결코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흔히 있어온 나이드신 분들의 세상을 향한 감상적인 일종의 개탄이라고 일축하기엔 머뭇거려지는 당당치 못한 현실이 있음을 너나없이 시인해야만 할 것 같다.
한 문학담당 기자의 보고에 의하면 현재 간행되고 있는 문예지가 42종이 넘고 있다고했다(『한길문학』 1990, 창간호). 서점에 가보면 출판사별로 시집코너가 있을 정도로 시집들이쏟아져나오고 있다. 거기에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으로 자못 시의 익명시대를 구가하고 있는시집들이 무슨 이 시대문학의 향도들처럼 일종의 패션쇼를 벌이고 있다.
필자가 시전문지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탓이겠지만, 필자의 책상 위에 배달되는 시집들이 한달에 20여종 이상을 넘고 있는 것이 근간의 형편이다. 그 시집들을 읽고 비록 인상적인 언급이긴 하지만 자신의 느낌을 피력한 봉함편지 한 통을 띄우는 그런 아름다운 풍속은 이젠 엄두도 낼 수가 없다. 그런 무례를 아무런 느낌도 없이 예사로 범하고 있다.
이러한 물량의 풍요로움이 어깨서 나쁜가. 어차피 예술이란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본래 우리나라는 시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조선시대의 우리선비문화가 지니고 있었던 시의 범속주의가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시각 또한 없지가 않다. 그러나 문제는 뭐라고 해도 작품의 질이며 그러한 양산의 형태를 빚어내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이 시대의 트리비얼리즘이다.
냉엄한 비판을 받아 마땅한 이 「하찮게 여기기」「그대로 지나가기」「사소하게 여기기」의 의식은 지난 우리 80년대가 강타한 정치적·사회적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 빚어낸 또 하나의 폐기물일터인데, 그것은 대상을 향한 독묻은 화살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것이되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대상에대한 진정함, 순정한 자세가 그립다. 그것이 90년대를 여는 우리의 힘이라고 믿는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상을 빚어낸 무분별한 문예지와 출판사들, 이른바 「문화센터」라는 이름의 문학사숙들, 보수적인 신인 등용제도의 개방에 따른 처세주의, 저널리즘의 화제주의로 끝나는 가치평가태도, 무엇보다도 오리엔테이션도 제대로 되어있지않은 시인들 자신의 「세상 나서기」등에 냉엄한 자각이 따라야 할 것이다.
오리엔테이션의 본래 뜻이 무엇인가. 신전을 지을 때는 반드시 동향으로 앉힌다는 뜻이다. 바른 방향을 찾아야 할 때다. <시인·『현대시학』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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