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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우리 내부의 「냉전」/이규진 정치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노태우대통령의 이번 방미기간중엔 볼썽사나운 일이 늘 따라다녔다. 미국내 반정부단체인 한청련소속 젊은 이들이 노대통령의 중요행사가 열리는 장소마다 따라다니며 극성스러운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만난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앞에서는 노대통령 일행이 도착했던 지난 3일 오전(현지시간)부터 4일 오후 늦게까지 한복차림의 20여명이 『조국은 하나』 『민자당 박살』 『노태우 처단』을 외치며 북과 꽹과리를 쳐댔다.
이들은 6일 워싱턴까지 몰려와 노대통령과 수행기자단이 오찬간담회를 갖던 워싱턴 서북부 주택가와 주미 대사관저 앞에서도 똑같은 소란을 피웠다.
현지교포들은 이들 대부분이 여러가지 이유로 서울을 떠나와 미국 영주권을 얻었거나 유학중인 학생들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시위를 하는 것은 미국법에 따른 자유이며 당국에 신청해 허가받은 데모영역안에서의 의사표시는 전혀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소련과 수교를 트고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바꾸기 위해 미국에 온 조국의 대통령을 『군사파쇼정권』 『독재자』로 매도하는 것이 미국사람은 물론 한국인에게도 얼마나 공감을 줄지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또 미국에 온 사연이야 어떻든 그들이 더불어 살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양키 고 홈』을 외칠 때는 사고의 기저와 배경이 궁금하다고 말하는 교포들이 숱했다.
그들은 한소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는 호텔 바깥에서 『냉전을 종식시키라』고 주장하기도 해 몇개의 슬로건 자체가 앞뒤가 맞지않는 대목도 있었다.
비록 수십만 재미동포들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더라도 이국만리 타향에서 이런 행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아직 우리 내부의 냉전이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절실했다.
박정희·전두환대통령시절 미국에서 벌였던 반한단체의 활약상과 그로 인해 교포사회가 갈등을 일으켰던 데 비하면 요즘 일부 젊은이들의 반정부운동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며 교포사회로부터도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다는 다수 교포들의 설명이 귓전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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