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신용불량 구제 원칙을 지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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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대한민국은 '신용불량 공화국'이다. 신용불량자가 3백50만명이니 4인 가족 기준으로 네 집 걸러 한 집에 신용불량자가 있는 셈이다. 30만원 이상의 금융기관 채무를 3개월 이상 연체하면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히는데, 현재 빚을 한달 이상 연체한 잠재적 신용불량자까지 합치면 그 수는 4백만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게 금융계의 추정이다. 침체된 경기가 이른 시일 내에 크게 회복될 기미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용불량자 문제는 악화되면 됐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현재 한 금융회사에만 채무가 있는 신용불량자에 대해서는 금융기관별로 이자를 깎아주고 상환기간을 연장해주며 심지어 원금도 탕감해 주고 있다. 다중채무자의 경우도 지난해 민간자율 형태로 마련한 '신용회복지원위원회'가 작동 중이고, 또 산업은행과 LG투자증권이 주도해 '다중채무 공동추심'프로그램을 가동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신용불량자의 30%를 담당하고 있는 자산관리공사가 회사의 수익도 올리고 신용불량자 문제도 해결하는 묘안이라며 신용불량자의 빚을 최고 50%까지 탕감해주겠다는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용불량자 문제를 방치할 경우 예상되는 사회적 충격을 감안할 때 일시적 신용불량자를 구제하기 위한 지원 프로그램들이 도입되는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 프로그램은 제각기 지원 자격이나 기준, 혜택의 정도가 달라 심각한 수준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있다. 금융시장의 큰손들이 원금의 50%니, 70%니 하면서 파격적 '빚탕감 잔치'를 벌이니 신용불량자 입장에서는 어느 잔치의 떡이 더 큰지 저울질하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인터넷상에서 빚을 덜 갚기 위한 정보를 교환하는, 소위'신용불량자 카페'가 2백여개나 있고 심지어 '빚 안 갚는 법'을 가르치는 유료 사이트마저 성행할 정도다.

이런 현상은 건전한 소비생활과 금융행위를 영위한 사람들을 일시에 바보로 만들고 있다. 내가 애써 건전하게 살아봤자 흥청망청 무책임하게 낭비한 사람들 빚을 떠맡아야 한다는 불쾌감과 허탈감이 기운을 빠지게 만든다.

사실 정부가 근시안적인 내수진작책을 동원한 후 과소비가 우려되고 가계빚 문제가 불거질 때부터 신용불량자 문제는 예견되어 왔다. 또 정부가 뒤늦게 가계대출 억제책을 내놓고 지난해 10월 개인신용회복지원(work out)제도를 도입할 때도 전문가들은 '온정주의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고 경고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신용불량자 문제가 금융 시장과 한국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 문제의 해결도 금융기관 자율에 맡겨놓을 수도, 그렇다고 정부가 앞장서서 개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원칙적으로 신용불량자를 구제할지는 금융기관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이뤄져야 실효성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금융기관이 임의로 대상 범위를 확대하고 기준을 바꾸는 바람에 이 과정에서 심각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벌써 수 차에 걸친 신용사면으로 원칙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 금융시장의 논리로 풀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해져 버렸다. 신용불량자가 4백만명에 육박하면서 신용불량자 구제 제도의 기본 취지는 퇴색하고 사회적 압력으로까지 대두된 상황이다.

신용불량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불안과 도덕적 해이의 최소화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국가 경제.사회적 차원의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된다. 현재로서는 한시적 차원의 개인부채 전담 자산관리공사(배드 뱅크)를 만들어 금융기관의 개인부실채권을 사들이고 생계형 신용불량과 영세기업형 신용불량 등 신용불량 유형을 세분화해 좀더 정교하고 통일된 채무 조정안을 마련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일이라고 본다. 정부는 금융시장의 불안과 시장 경제의 발목을 잡는 도덕적 해이 두 가지를 모두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 신용불량공화국의 오명을 벗고 세계 12위의 경제대국다운 신용사회를 정착시킨다는 대명제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인실 한국경제연구원 금융재정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