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4) 늘푸른 소나무 - 제3부 범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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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김원일 최연석 화
객차 칸은 한 동도 없이 하물칸만 길게 매단 무개열차는 부산역을 북으로 쉴없이 달렸다. 한 뎃바람이 차갑게 무개차 안을 훑었다. 수인들은 추위에 떨며 다닥다닥 붙어 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허기와 졸음으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갈증으로 얼굴을 들면 사방은 칠흑의 밤으로 옆 사람조차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철길을 타고 가며 쇠바퀴가 일으키는 파열음과 바람 소리만이 지축을 흔들었다. 무개차 칸 안에 분명 어디엔가 박혀 있을 인솔자 셋의 위치도 알 수가 없었다.
석주율은 얼굴을 들고 눈 앞을 스쳐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뒷박처럼 생긴 차칸이기에 벽에 가려 들녘은 볼 수가 없었으나 하늘만은 훤하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눈 앞에 먼 불빛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구름낀 하늘이라 별이 보일 리 없었기에 허기와 갈증에 따른 환영이겠거니 여겨졌다, 무한대의 우주공간이 이렇게 암흑으로 가리워질 때, 그는 모래알 같은 한 생명으로서 자신의 왜소함을 느꼈다. 아침에 해가 솟으면 이슬처럼 사라질 인간의 운명을 생각할 때, 그 어떤 보람 있는 삶도 개미의 일생과 하나 다를 바 없는, 공수래공수거(공수래공수거)의 무위임을 실감하였다. 앞날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고, 어둠같은 절망만이 마음을 허허롭게 채웠다. 동운사조실승의 예언처럼 역시 여여(여여)에 착심하지 못한 탓으로 내가 이 지경에 당도했는가, 하는 때늦은 후회가 들기도 하였다.
『형씨.』
수갑을 함께 찬 학생복의 애젊은이가 낮은 목소리로 석주율을 불렀다. 그가 무릎 사이에다 얼굴을 박았다. 무슨 할 말이 있겠거니 싶어 주율도 그의 동작을 따랐다.
『우리가 배를 타고 타국까지 끌려가는 것 같지는 않군요. 저 평안도나 함경도의 벌목장으로 실려 가는 게 아닐까요?』
애젊은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저는 형기가 일년이 채 못 남았는데, 형기를 다 채워도 놈들이 미국의 흑인 노예처럼 아주 붙잡아두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밭에다 쇠고랑을 채워서 말입니다.』
『글쎄요.』
『저는 강치현이라 합니다. 동래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 고향으로 내려가, 지난 삼월 스무날 함안도 군복면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지요.』
『만세운동으로 피체되었다면 형량이 높습니다그려. 저는 전과가 있어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 농민 만세꾼 삼천오백여 명이 군북 주재소를 포위하여 갇힌 자를 풀어내라고 투석을 했지요. 제가 앞장을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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