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돌 흰 돌] 바둑계 실력 랭킹은 왜 안 매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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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원이 프로기사에게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제도를 시행한다. 이 번호는 프로 데뷔 순서에 따라 매겨진다. 말하자면 연공서열을 매기는 것이다.

현대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9단이 당연히 1번을 받게 됐고 민중식씨와 이성범씨 등 해방 전후의 바둑계를 이끈 노국수들이 2~11번을 받았다. 김인9단은 36번, 조훈현9단은 48번, 서봉수9단은 80번이고 유창혁9단 126번, 이창호9단은 132번, 이세돌9단은 178번이 됐다.

왜 이런 제도를 갑자기 시행하는 것일까. 아마도 선배와 후배를 제대로 알자는 뜻일 게다. 이세돌이 아무리 바둑이 세다 해도 서열은 178번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요즘 바둑계는 젊은이 세상이고 40,50대 선배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과거 정상의 기사였던 대선배들이 이름도 모르는 새내기에게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오늘날 바둑이 스포츠로 변신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바둑계엔 예도의 전통과 함께 선후배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귀중한 전통으로 생각해 왔다. 그 점을 생각하며 일부에선 바둑계가 과연 이대로 가도 되나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선후가 뒤바뀌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프로세계의 생명은 랭킹이다. 팬들은 연공서열보다 실력의 순서를 알고 싶어한다. 프로스포츠에서 랭킹 없는 개인종목은 하나도 없고 축구 같은 단체전도 국가별 랭킹이나 포지션별 랭킹을 매겨 관심을 유도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랭킹이 등락할 때마다 팬들은 희비를 느낀다.

그런데 바둑계는 랭킹제를 시행하지 않고 있고 시행할 계획도 없다. 왜 안하는 것일까. 바둑계가 점잖기 때문이다. 명성과 실제 랭킹 사이의 괴리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받고 싶지 않고 또 동료나 선배들이 상처받는 것을 보고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너무도 아마추어적이다.

프로기사들 간에 연공서열식의 번호를 한번 매겨보는 것도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다. 월급사회에서도 사오정 오륙도라는 단어가 횡행하는 마당에 매일 치열한 승부에 몸을 던지는 프로세계에서 선후배 서열을 번호로 매긴다는 게 미소를 짓게도 만든다.

그렇더라도 바둑계가 팬들을 생각한다면, 프로바둑의 재미와 인기를 생각한다면, 랭킹제를 시행해야 한다. 랭킹제를 놔둔 채 연공서열식의 번호부터 매기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수순착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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