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논객들의 싸움터 '80년대 창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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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표지에 사람좋게 웃는 얼굴이 실린 지은이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출판평론가로, 출판인들간에는 '싸움꾼'으로 알려져 있다. 출판시장의 흐름을 예리하게 짚고, 한국 출판의 나아갈 바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입 다물고 있으면 편할 일에도 굳이 나서 입바른 소리를 해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지은이의 자전(自傳) 격이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고등학교부터 17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한 개인의 인생역정을 살피자고 책을 들지는 않을 것이다. 책은 1980년대 깨어있는 이들의 사상적 고향이었던 창작과 비평사(이하 창비)의 이면을 더듬어 보는 미덕이 있다. 창비의 출판영업자로, 당대의 논객들에게 '지적 세례'를 받아가며 온몸으로 시대와 부딪쳤던 이야기가 그득해서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채광석이 생전에 술판의 문학논쟁을 주도하며 창비를 소시민적이라 비판했단다. 그가 끼는 자리는 자주 싸움판으로 변했다며 지은이는 "그때는 싸움을 말리는 일이 너무 싫었지만 지금은 그때가 그립다"고 돌아본다. "기호야, 나 오래 못 살 것 같아"라던 시인 김남주가 작고했을 때 지은이는 '사랑의 무기', '사상의 거처' 같은 그의 시집을 열심히 팔아 유족을 돕겠다는 생각뿐이었단다. 그렇다. 그것이 그가 현실에 참여하는 길이었고 세상을 바꾸는 길이었다.

'소설 동의보감' 등 밀리언 셀러를 만든 뚝심.전략과 함께 군사독재시대 금서를 프린트해서 대학서점에 팔던 무모함이 지은이의 자산이었음을 알고나면 출판쟁이 한기호의 오늘도 이해가 간다. '열정은 힘이 세다'. 책을 읽고 든 생각이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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