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방송인 평양 만남] 본격 전파교류 물꼬 텄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지난 18일 오후 평양 인민문화궁전 대회의실. 2백여명의 눈동자가 대형 스크린에 고정됐다. SBS '여인천하'가 안숙선 명창의 구성진 구음을 배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난정의 목욕 장면, 경빈 박씨의 사약 받는 장면…. 30분이 숨가쁘게 흘러갔다. 여기가 서울인지 평양인지, 잠시 헷갈리는 풍경이었다.

지난 15~19일 평양에서 열린 '방송인 토론회와 방송영상물 소개모임'은 이렇게 남북 방송사에 한 획을 그은 만남이었다. 규모도 규모지만 질적인 면에서 교류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기 때문이다.

◇남북 방송교류의 새 장=방송 교류는 분단 국가 간에 사회.문화적인 차이를 좁히는 데 크게 기여한다. 독일 통일에 '전파의 힘'이 절대적이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의 경우 방송 교류는 개별 방송사들의 '각개 약진'에 의존한 바 컸다. KBS '평양노래자랑'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방송위원회와 북측의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즉 방송 정책 기관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 방송 교류의 큰 틀을 만드는 작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우승 한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동.서독의 경우 1970년대 초반부터 방송영상물 교류와 프로그램 시사회를 열었고, 제작에 관한 정보를 나눈 바 있다"며 "이런 만남이 통일에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대규모 남북 방송인 교류는 동.서독에서도 없었던, 주목할 만한 행사"라면서 "다만 안정적 만남을 위해 '방송교류기본합의서'체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성과와 향후 일정='방송인…'엔 남측에서 방송인 1백30여명, 북측에서 6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편성ㆍ제작, 방송언어, 방송기술 등 3개 분야의 토론회를 통해 접점을 시도했다. 이런 가운데 프로그램 교차구매가 이뤄진 것은 큰 성과다.

이번에 북측은 '가시고기'(KBS) '어미새의 사랑'(MBC) 등 남측의 프로그램 14편을 샀다. 또 남측은 '백두산 천지의 사계절''묘향산'등 북측 프로그램을 66편이나 구입했다. 남북 방송계가 일종의 '견본시장'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방송위는 13억원을 들여 조선중앙방송에 디지털 방송 장비를 설치했다. 이 장비들은 향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교류의 확실한 끈 하나를 남겨 놓고 온 셈이다.

향후 일정에 관한 큰 그림도 그려졌다. 방송위는 우선 내년 아테네 올림픽 때 남북 공동선수단 구성이 성사되면 공동취재단을 구성하자고 제의했다. 또 기술인 상호 연수, 날씨 정보 교환, 남북 방송용어집 공동 발간은 어느 정도 의견을 같이 한 상태. 여기에 다큐멘터리ㆍ어린이 프로를 공동제작하는 데에도 공감대가 형성됐다. 구체적인 진전을 위해 방송위는 다음달 중 실무단을 북측에 보낼 계획이다.

◇합의문 작성이 과제=이번 행사에서 아쉬운 것은 우리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방송교류 합의문 작성에 도달하지 못한 점이다. 북측이 "관계기관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회의에서 북측은 "시작이 반이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향후 실무자 협의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와 관련, 노성대 방송위원장도 평양을 떠나면서 교류 확대를 위해 방송위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김택환 미디어 전문기자, 이상복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