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발언 변론 본질 너무 가볍게 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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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협 천기흥 회장

'이용훈 대법원장 자진 사퇴 촉구'라는 대한변호사협회의 초강경 대응은 21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임시 상임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의결됐다.

천기흥(63) 회장을 비롯한 이사진은 회의 전부터 굳은 표정이었다. 언론 취재를 일절 거부하던 천 회장은 회의실로 가기 위해 집무실을 나서다 마주친 취재진에 언성을 높일 정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오전 11시30분 시작된 회의는 두 시간가량 비공개로 진행됐다. 점심으로 도시락을 준비했으나 격론이 이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남았다.

◆ "회원들 강력 대응 요구"=천 회장과 유정주 부회장을 비롯해 9명의 참석자들은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는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라는 이 대법원장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회의 초반 일부 이사가 "재조와 재야의 싸움이 언론의 흥밋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지만 "우리 의사를 분명히 표시해야 한다"는 강경론에 밀렸다고 한다. 특히 회원들의 강력한 대응 요구가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오욱환 변협 사무총장은 "변협에 이 대법원장 발언의 부적절성을 비판하는 회원들의 전화가 폭주했다"고 전했다.

◆ "사퇴 촉구 아니면 무의미"=회의에 참석했던 하창우 변협 공보이사는 "이 대법원장의 발언이 사법부 수장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지적에 참석자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 다른 참석자인 민경식 법제이사는 "이 대법원장이 변론의 본질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는 얘기에 대부분이 동의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얘기를 했는데 회의가 진행될수록 (이 대법원장에 대한 비판) 수위가 점점 높아졌고 사퇴 촉구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설명했다.

당초 변협의 대응은 ▶발언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거나▶대법원장의 사과를 요구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대해 한 참석자는 "법원행정처에서 연락을 해와 '발언의 진의가 잘못 전해졌다'고 해명하며 무마해 보려 했다"며 "그러나 '사퇴 촉구'가 아니면 다른 대응은 무의미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밝혔다.

변협이 대법원장을 상대로 사퇴 요구 또는 권고를 한 것은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1971년 민복기 대법원장, 85년 유태흥 대법원장, 93년 김덕주 대법원장에 이어 다섯 번째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도 성명에서 "이 대법원장 발언은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변호사.검사의 지위를 법원의 보조기관으로 함부로 전락시켰고,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는 변호사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며 "자신의 거취를 조속히 결정하라"고 밝혔다.

장혜수 기자

◆ 대한변호사협회=1949년 제정된 변호사법에 의해 52년 창립된 국내 최대 변호사 단체. 산하에 14개의 지방변호사회가 있으며, 7611명의 개업회원과 811명의 준회원(9월 19일 기준으로 개업하지 않은 변호사)이 가입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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