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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8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전 남로당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월북한 권오직도 끝내 숙청/해방일보 없어진 후엔 주간지 「건국」 창간
이관술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권오직은 해주로 탈출했다. 그는 미군정의 체포망을 피해 이북으로 갔으나 그곳도 안주의 땅은 못됐다. 53년 김일성 도당의 남로당 학살때 체포되어 55년말 처형되었다.
정판사 위폐사건의 또 한사람 박낙종은 내고향인 경남 산청군 출신의 대선배였다. 대학도 같은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이다.
그의 아들 우승과는 진주고보때 부터의 친구다. 우승은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한성은행(현 조흥은행의 전신)에 다니면서 경성제대 그룹의 지하조직에 참가하여 해방직전에 경찰에 체포된 일도 있다. 그의 결혼식은 동성상업학교 강당에서 그 학교 교장 장면의 주례로 거행되었다. 그의 장인 조윤제(국문학자ㆍ뒤에 서울대 교수)는 그때 동성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나는 그때 장면,조윤제와 알게되었다. 해방 후 박우승은 전평(전국 노동조합 평의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박낙종은 해방일보가 들어있는 정판사 사장이기 때문에 매일 만났다. 그는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아 목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박우승이 자기 아버지 박낙종에게서 온 편지를 나에게 보여준 일이 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나의 심금을 울려 지금도 그 일부를 외고 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고? 여기가 해방된 나의 조국 조선인지? 지옥인지? 분간 못할때가 많다. 밤이되면 괴롭다. 바다 물새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니 과거 생각이 구름같이 솟아 오르고 앞날 생각을 하면 캄캄한 어둠 뿐이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 명이 10년 남았는지 20년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캄캄한 암흑 속에서 나의 생명이 끊어져 나간단 말이냐? 우리 조선에는 하느님이 정말 없을까?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내가 요사이는 간혹 하느님 생각을 하게된다.
우승아! 우리집 우리나라 운명이 왜 이리되고 마느냐? 나의 희망은 이제 너 하나 밖에 없다(우승은 독자). 문례(며느리의 이름ㆍ조윤제의 딸)와 행복한 가정을 가꾸기 바란다. 내걱정은 하지 말아라!……』 밤에 바다 물새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박낙종도 10년 20년 뒤가 아니라 불과 4년 후에 교도소 내에서 죽고만다.
정판사 위폐사건을 기소하고 구형한 검사 조재천도,김홍섭도 그 뒤 몇해 안가서 젊은 나이로 모두 병사하고 지금은 없다. 피고들은 물론 구형자도 지금은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다.
정판사 3층 사무실에서 쫓겨난 우리 해방일보 사원들은 갈 곳이 없었다. 사장 권오직과 주필 조두원은 피신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때부터 정태식이 해방일보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공산당 중앙본부는 남대문앞 일화빌딩으로 옮겼다. 민주주의 민족전선도 그 일화빌딩에 같이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해방일보는 편집국과 영업국ㆍ공무국은 각각 분산하여 아지트를 구축하게 되었다. 우리 편집국은 해방일보를 대신하는 신문도 발간하지 못하고 아지트만 이리저리 옮기며 대책회의만 열고 있었으나 별 수가 없었다.
미 군정청의 인가없이는 새 신문을 창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해방일보에서 미 군정청 공보부장이 발급한 프레스 카드를 가진 유일한 합법성을 가진 기자이기 때문에 군정청 기자회견에 계속 출석하고 있었다. 군정청 출입기자단에서는 해방일보는 폐간이 아직 아니고 임시 정간이라고 해석해 주었기 때문에 나의 자격에는 별 이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간신문을 발행할 전망이 보이지 않아 공청기관지 「청년해방일보」,전평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 전농기관지 「전국농민신문」 등 주간신문의 편집을 맡게 되었다. 이 세신문을 다 내어도 1주일에 세번밖에 내지 못하므로 강중학이란 당원이 공보부에 등록만 해놓은 「건국」이란 주간신문을 우리가 창간하게 되었다. 권오직이 해방전 대전형무소에 있을때 대전 검사국에 강중인이라는 검사가 있었다.
그는 독립을 위해 불굴의 투쟁을 하고 있는 권오직의 인품을 존경하게 되어 다른사람을 시켜 권에게 의복과 음식물을 차입시켜주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강검사는 권오직을 따라 서울에 와서 민주법학자동맹에 가입했다.
강중학은 그의 동생이었다. 그들은 권오직과 같은 경상북도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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