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한·미 '동맹의 예의'를 지켜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9월 한.미 정상회담은 지나온 한.미 관계의 역사로 볼 때 가장 중요한 회담이 될 것이다'라고 2개월 전 바로 이 칼럼에서 지적한 바 있다. 전시작전통제권.FTA 문제 등 중차대한 현안은 한.미 관계의 역사가 큰 갈림길에 놓여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기에 한.미 두 대통령은 본인들이 지금 어떤 역사적 위치에 있는가를 새롭게 인식하고 현안의 심각성에 짓눌리기보다는 역사의 큰 흐름을 올바르게 집어갈 수 있는 지혜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미 두 대통령이 지닌 가장 큰 공통점은 민주국가의 국정 책임자라는 것이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본인들의 이념이나 집념에 과도하게 집착하기보다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의 힘을 모아 나라에 봉사하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일정한 임기에 묶여 있는 대통령으로서 국가정책이 임기에 따라 토막 나지 않고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항상 유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불필요한 아집이나 임기응변식 판단을 피하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두 우방의 안전과 발전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가 하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할 때 한.미 정상회담은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면에서 아직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은 뉴욕과 워싱턴이 한꺼번에 테러 공격을 받았던 9.11 충격의 5주년을 오늘 맞고 있다. 곧이어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 임하는 부시 대통령이 9.11의 악몽을 말끔히 씻고 균형 잡힌 감각으로 한.미 동맹의 미래를 구상하기를 우리는 기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21세기의 동아시아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의 상황인식 속에 확실히 자리매김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에서의 고전과 이와 연관된 미국의 위상 및 인기 하락이 아시아의 중요성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을 저해하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것이다. 미국도 태평양 국가라는 것, 그리고 미국의 장래도 태평양시대를 떠나서는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재삼 강조되기를 바랄 뿐이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 이래 민주주의가 보편적 가치와 제도로서 전 세계로 전파.확산되기를 역설하고 강조해 왔다. 그러한 노력은 성공과 실패가 혼재하는 불확실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기에 여러모로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민주화와 시장경제 발전에 크게 성공한 한국의 경우가 돋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한국의 성공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한 우방이 바로 미국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마디로 미국은 한국의 발전에 대해, 그리고 한.미 동맹의 공헌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다. 바로 그 한국이 태평양시대를 맞아 중국.일본.러시아 등 열강의 역학 관계 속에서 민주주의의 기치를 지키며 평화를 유지하는 데 능동적 역할을 자원하고 나선 것이다. 한.미 동맹을 어떻게 강화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한국의 미래는 물론이거니와 미국의 장래까지도 좌우된다 하겠다.

한.미 관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상황의 분위기에 밀려 동맹 관계의 중요한 문제들을 사려 깊고 신중히 처리하지 못하고 가볍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예컨대 북한의 위협에 대한 평가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일관성이 있어야 하며, 편의상 수시로 조정이 가능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상호 간에, 그리고 양국 국민에 대한 신뢰를 희석시키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동양의 가르침은 한.미 관계에 있어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다. 물론 이번 회담에서 모든 사안이 완전합의를 이루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두 대통령이 동맹의 미래를 위해 함께 고민하는 동지적 모습을 우리들은 보고 싶은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