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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시들어버린 연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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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열대림 키 큰 야자수 아래 핀/연꽃 한 송이/돌보는 이 없다/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점/아침 인사로 몸을 굽히고/아침에 일어나 혼자인/연꽃 한 송이/피어 있어/말 없는' 이 짧은 시에 그는 댓글을 붙여 보냈다. '절대고독을 사랑할 수 있다면, 아침에 혼자 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는 김 시인의 절대고독을 헤아리지 못한다. 그저 돌보지 않은 연꽃이 애잔하겠거니 싶었다.

연꽃이라면 나도 할 말이 좀 있다. 오래된 얘기다. 스님 한 분이 도자기 전시를 할 때 내가 거들어준 적이 있었다. 전시를 끝낸 스님이 맘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하나 가져가라고 했다. 인사치레로 망설이는 척했지만 내 눈에 드는 게 있었다. 연꽃 한 송이가 그려진 분청접시였다. 연꽃 위에는 '樂(낙)'자가 씌어 있었다. 스님은 '연꽃 보는 즐거움'을 표현했다. 정작 연꽃이나 글자가 내 눈을 끈 것은 아니었다. 그 접시 바닥에 실 같은 금이 살짝 가 있었다. 스님은 멀쩡한 작품 놔두고 금 간 접시를 잡은 나를 의아하게 보았다. 이게 좋다며 우겼더니 도리어 스님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후 연꽃 접시는 내 책상머리에 놓인 채 먼지를 뒤집어썼다.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둔 셈이다.

여름휴가 때 양평 세미원에 들러 홍련.백련을 실컷 구경했다. 쨍쨍한 폭염이 하 반가운지 봉오리를 활짝 벌린 연꽃에서 향기가 진동한다. 동행한 이가 그 향기에 겨워 '부생육기'의 주인공 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스러운 여인 운은 연꽃 봉오리가 입 다물 무렵 얇은 천에 찻잎을 싸서 넣었다가 다음 날 입을 벌릴 때 끄집어내어 차를 끓였다고 한다. 차에 스민 연꽃 향내는 운의 애교만큼 달콤할 것이다. 그러나 사시사철 연꽃이 피도록 조성된 세미원에서 내가 혹한 것은 연꽃 향기가 아니다. 그곳에는 연꽃을 소재로 한 문인들의 시가 벽면에 죽 늘어서 있다. 내 마음을 여지없이 뒤흔든 것은 춘원 이광수의 연시조다.

제목은 '연꽃'이다. 첫 연(聯)은 이렇다. '임 주신 연꽃봉을 옥화병에 꽂아놓고/밤마다 내일이나 필까 필까 하였더니/새벽이 가고 또 가도 필 뜻 아니 보여라' 사랑의 정표로 받은 연꽃이 피기를 바라는 춘원의 맘이 안쓰럽다. 다음 연이 이어진다. '뿌리 끊였으니 핀들 열매 바라리만/모처럼 맺힌 봉을 못 펴보고 갈 양이면/제 비록 무심하여도 내 애닯아 어이리' 열매는커녕 앙다문 봉오리가 애를 태운다. 마지막 연에서 춘원은 눈물겨운 심사를 털어놓는다. '이왕 못 필 꽃은 버림즉도 하건마는/시들고 마르도록 두고두고 보는 뜻은/피라고 벼르던 옛 뜻을 못내 애껴함이외다'

피라고 벼르던 뜻이 무얼까. 아마 '순정'일 것이다. 순정은 저버릴 수 없다 해도 시든 꽃에서 시든 사랑을 예감하는 춘원의 마음은 애달프다. 그러나 꽃이 피어 열흘 붉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먼저 꽃은 시들고 마는 것이다. 스님에게 받았던 '낙'자 적힌 연꽃 접시는 점차 금이 크게 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봤더니 접시는 반으로 동강나버렸다. 내 그럴 줄 이미 알고 가져왔으니 섭섭할 일도 없다. 끝나지 않는 낙이 어디 있으며 시들지 않는 연꽃 어디서 찾겠는가. 시인은 연꽃 보고 절대고독을 떠올리거나 순정을 간직하고자 한다. 나는 어느 쪽인가. 당나라 시인 이상은과 내 마음이 똑 같다. '임 그리는 마음 꽃과 다투어 피지를 마라/한 가닥 그리움은 한 줌의 재가 되리니(春心莫共花爭發 一寸相思一寸灰).'

손철주 학고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