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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석재의천문학이야기

동북공정과 세종대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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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세종대왕은 중국에서 입수된 천문학을 가지고 우리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 현상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어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이는 베이징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기술한 천문학이 서울 하늘에서 맞을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일국의 제왕일진대 어떻게 내 나라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측하지 못하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대왕의 고뇌는 동북공정이 활개를 치는 요즘 꼭 되새겨 봐야 한다.

실제로 세종대왕이 뙤약볕 아래 앉아 의관을 정제하고 일식을 기다린 일이 있었다. 왕조시대 달이 왕의 상징인 해를 가리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고됐던 일식이 15분가량 늦게 일어났다. 그러자 집현전에서 잠자는 신하를 용포로 덮어주던, 인자하기로 소문난 대왕이 천문관에게 태형을 내렸다. 곤장을 맞은 천문관의 고통보다 대왕의 심적 고통이 더 컸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중국에서는 천자, 즉 하늘의 아들로 일컬어지는 자기들 왕이 하늘의 뜻을 받아 책력을 펴고 천문현상을 널리 알리는 '춘절'을 아직도 성대하게 공휴일로 쇠고 있다. 중국, 즉 가운데 나라가 변두리 나라들에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자축 행사 성격이 컸던 것이다. 동지 때마다 사신이 새해 관련 '하늘의 정보'를 중국으로부터 받아오는 것이 못마땅했던 세종대왕은 이순지 등을 시켜 칠정산 내외편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책력 체제가 확보된 것인데 이는 한글 창제 못지않은 대왕의 치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미 그 당시에 중국의 정신적 동북공정에 대항해 싸운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중국 사신의 방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사신 일행이 경복궁 안에 설치된 간의와 같은 천문관측 기구를 보고, 감히 중국 천자나 할 수 있는 일을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하고 있다며 시비를 걸어올까 귀찮았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신이 오면 그러한 기구들을 모두 숨겼다고 전해진다. 대덕특구에 있는 한국천문연구원 본원 앞마당에는 세종이 만든 천체관측기구 간의가 복원돼 있다. 그것을 보면 그 위에서 천문관들과 같이 천체 관측을 하던 대왕의 모습이 떠오른다.

옛 천문학에서 음양오행이란 태음(달).태양(해).5행성(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을 일컫는다. 근정전 옥좌 뒤에는 봉우리가 5개인 산 위에 해와 달이 나란히 그려진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이 또한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우주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임금이라는 자리는 우주가, 하늘이 내려주는 것임을 상징한다. 이 일월오봉도가 세종대왕과 함께 내년부터 발행되는 새 만원짜리 지폐에 새로 등장하게 된 것은 정말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새 만원짜리 뒷면에는 세종대왕 시대 전후로 만들어진 천문유산 둘이 나온다. 하나는 바탕무늬로 이용된 국보 제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로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별자리를 정리한 그림이다. 이는 고려 말 충신 유방택에 의해 정리됐다. 나머지 하나는 국보 제230호인 혼천의로 혼천시계 위에 놓여 있던 천체관측 기구다.

찬란한 민족과학의 전통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철저하게 말살된다. 첨성대.서운관.관상감 등으로 이어져 내려온 국립 천문기관도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이러한 황량한 모습은 해방 후에도 무려 30년이나 이어지다가 1974년 국립천문대가 설립돼 국가기관이 다시 탄생하게 된다. 국립천문대는 소백산에 최초의 현대적 관측소를 세워 찬란한 천문학 전통을 이어가다가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한국천문연구원이 됐다.

새 만원짜리 지폐 뒷면에는 한국천문연구원 보현산천문대에 있는 지름 1.8m 광학망원경도 등장한다. 우주의 섭리를 따라 연구하며 살아온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가 총망라돼 있는 '박물관 화폐'가 나오는 것이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장

◆약력=서울대 천문학과 졸업, 미국 텍사스대(오스틴) 박사,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