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한연승 회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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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변변치 못한 형을 둔덕분에 그 흔한 과외 한번 못하고도 남들이 어렵다는 대학에 거뜬히 입학, 3월이면 대학생이 되는 대견스런 동생을 사랑하고 또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의 체험」을 입학 선물로 주고싶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후 지방의 조그마한 단자회사에 겨우 취직, 대학 재학 때 타도대상으로 매도해온 사회현실과 경제구조에 부닥쳤을때 회의와 불만이 앞섰는데 미처 못배운 지식을 몸으로 때우느라 막상 일에 몰두하다 보니 사회현상에 대한 나 자신의 인식이 너무 변해 스스로도 놀랐고『지적탐구는 부지런히 하되 판단은 사회경험 3년 뒤로 미루라』던 어느 교수님의 충고와 함께 대학시절에의 회한이 새삼 떠오른다.
대학에 갓 입학 했을 때는 입시를 위한 주입식 교육만 받아왔기에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지식의 백지상태에서 선배들이 불어 넣어주는 신기한 주의·주장과 사상은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던「프레시맨」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으며, 현실의 소외계층이 느끼는 불만과 한을 결집시켜 현실을 전면적으로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는 충동은 대학 초년생을 완전히 매료시켰다.
그래서 학업과 개인생활을 모두 저버리고라도 오직 혁명과업(?)과 조직사업에 전념하는 전문적인 투사가 되기 위해 지하서클에 정열을 쏟았다. 극단적인 혁명노선과 폭력을 포함한 적극적 공세를·정당한 논리로 받아들였고 한걸음 나아가 민주화라는 명분을 통해 계급혁명과 주체사상을 그대로 추종하기도 했으며 행동대원으로 앞장서다가 결국 예정보다 일찍 군입대하는 신세가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 했을때는 맹목적인 추종에서 다소 비판의식이 생겨 민중해방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어 있었고 막연한 정의감에 빠져 부분적 모순을 극대화시켰던 선배들의 흑백논리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사회구조가 극단적 대결구도로는 설명이 부족할 뿐더러 잘못된 정치·경제발전의 타파를 위해 과연 이질적 이데올로기가 필수 불가결할까 하는 의심을 품으면서 대학을 졸업했다.
막상 닥쳐온 현실 앞에 그동안 논밭 팔아 공부시켜준 부모님에 대한 빚도 갚고 뒤따라 오는 동생들의 학비문제 등으로 취직공부를 하면서 비로소 감성적인 정의감에 빠져 학문을 팽개쳤던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으며 사회현상을 어느정도 체험한 지금은 민중해방이론의 허구성과 모순을 「정확히」 이해 할수 있게 됐다.
더구나 최근 사회주의국가들에서의 반사회주의 혁명은 계급혁명이론의 비현실성을, 루마니아 독재체제의 붕괴는 주체사상의 허망됨을 확신케 해주었다.
한 시대의 사상조류에 휩쓸렸던 나의 사상적 방황에 대한 체험담이 동생의 대학생활에 참지식이 되리라 믿으며 아울러 올 봄 입학하는 새 대학인들도 대학은 학문을 위한 쉼 없는 자기계발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곧 시작될 사상여행에 꼭 참고해 주었으면 한다.

< 대구시 달서구 본동276 ><회사원>한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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