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걸 교수의 공공 디자인 산책 <10> 벤치, 앉을 만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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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

영국 런던

서울의 전통거리인 인사동 길을 따라 놓여 있는 돌 벤치(사진(上))는 전통적인 석물 조형의 맛을 살린 것입니다. 주변과의 조화도 꾀하면서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기능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카로운 모서리가 살아 있는 데다 화강석이 주는 차가운 느낌 때문에 보행자에게 두려움마저 들게 합니다. 여름.겨울에는 앉기 어렵고, 보행자가 두리번거릴 만한 곳에 놓여 있어 안전사고도 간간이 발생합니다. 그런가 하면 서울 충무로에는 조각작품처럼 아름다운 벤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브론즈(청동)로 만들어진 이 벤치는 여름철에는 앉을 때 화상(火傷)을 조심하라는 경고표지가 붙어 있어 시민들을 당황케 합니다.

영국 런던의 벤치(사진(下))는 단순하지만 잘 살펴보면 안락하면서도 안전한 벤치를 만들기 위한 배려가 엿보입니다. 몸체를 둘러싼 2cm 두께의 우레탄 고무는 비가 와도 물기를 쉽게 뱉어내며, 사계절 기후에 잘 대응하는 소재입니다. 검소한 모습의 이 벤치는 형태와 재료 양 측면에서 친화적인 느낌을 줍니다.

디자인은 시각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벤치는 보기에 평범한 공공시설물이지만 사실은 인간공학적인 타당성, 구조적인 안정성, 유지관리상의 편의성, 안전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제품입니다.

형태와 크기, 재료 등 수많은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이용자를 섬기는 벤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시민들은 보기도 좋고 앉기도 좋은 벤치를 원합니다. 삶의 공간에서 이용 행태를 도외시한 벤치들은 이제 '앉을 수 있는 벤치'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권영걸 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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