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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10. 21세기의 콜로세움 - 할리우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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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미국 서부의 최대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101번 고속도로(일명 '할리우드 하이웨이'). 이 길을 따라 약 20분을 달리면 '웰컴 투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인 유니버설이 직영하는 테마 파크다. 영화 촬영장을 겸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볼거리와 놀거리가 가득한 놀이공원일 뿐이다.

이곳에서 요즘 가장 인기있는 코너는 '슈렉 4-D'극장이다. 취재팀이 찾아간 지난 8월 말 극장 앞에는 1천여명의 관람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양한 옷차림과 피부색 사이로 각종 언어가 춤추는 현장은 그 자체로 '리틀 지구촌'이고, '21세기의 바벨탑'이었다.

피오나 공주를 납치한 파콰드 영주가 전속력으로 모는 마차는 화면에서 튀어나와 그대로 관객을 덮친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하는 순간 마차에서 튀긴 물방울이 사람들 얼굴로 떨어지고, 객석은 마차와 함께 요동을 친다. 거대한 용이 불덩이를 쏟아내자 뜨거운 바람이 확 밀려온다.

"3차원 디지털 입체영상에 촉각을 가미해 보고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관객이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만든 세계 최초의 4차원 영화"라는 것이 홍보담당자의 설명이다.

'슈렉 4-D'코너는 지난 5월 개관 이래 전회 만석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한번 더 보겠다"며 보채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는 부모들의 모습은 이곳에서 흔한 풍경이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가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지구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때로는 감동, 때로는 재미, 때로는 꿈의 옷을 입고 할리우드는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유발한 공포와 경계심도 '팍스 할리우디아나'의 미소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할리우드의 영화사 드림웍스가 5천만달러를 들여 제작해 2001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슈렉'은 전 세계에서 7억6천만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평균 입장료를 5달러로 따져 1억5천만명 이상이 못생긴 괴물 슈렉과 피오나 공주의 이색 러브 스토리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는 얘기다. 여세를 몰아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슈렉 4-D'로 또 한번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할리우드의 위세는 거인의 독주나 다름없다. 2002년 한 해 동안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2억5천만달러 이상의 흥행수입을 기록한 영화는 모두 여섯 편이었다. 1위 '스파이더맨'에서 6위 '맨 인 블랙'까지 할리우드 영화가 모조리 휩쓸었다. 지난해 미 영화업계는 4백49편의 영화를 개봉해 미국을 포함, 전 세계에서 1백91억달러의 입장료 수입을 올렸다.

할리우드가 배급한 볼거리에 정신이 팔려 지구촌 남녀노소 전원이 한 해 3달러 이상을 '팍스 할리우디아나' 입장료로 지불한 셈이다. '21세기의 콜로세움'이 할리우드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미국영화협회(MPAA)에 따르면 지난해 할리우드 영화 편당 평균 제작비는 5천8백80만달러였다. 게다가 개봉작 판촉비로 편당 3천62만달러를 썼다. 영화 한편을 만들어 출시할 때마다 평균 8천9백42만달러(약 1천억원)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자금력에 바탕을 둔 물량공세만으로 할리우드의 독주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미 영화관계자들은 말한다.

로마제국의 검투사를 소재로 한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의 제작과 각본을 맡았던 데이비드 프랜조니는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는 1백% 허구의 산물"이라면서 "금기(禁忌)가 용납되지 않는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이야말로 할리우드의 최고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할리우드는 시대사조와 대중심리를 재빨리 파악해 영화화하는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다.

상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최고권력자에서 극악무도한 범죄자까지, 반체제에서 포르노까지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할리우드의 상상력은 때때로 미국의 국익과 충돌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상업주의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절묘한 결탁을 이뤄내고 있다. 특히 전쟁영화가 그렇다.

9.11 테러를 전후해 할리우드에서는 전쟁과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 개봉이 줄을 이었다. 9.11 석달 전 진주만 피습의 충격을 다룬 '진주만'이 개봉됐고, 미군의 소말리아 참사를 그린 '블랙호크 다운'이 2001년 말에 나왔다. 이듬해 '컬래터럴 대미지' '위 워 솔저스' '섬 오브 올 피어스'등이 잇따라 개봉됐다.

대부분 미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미 국방부에는 할리우드 담당관이 따로 있고, 육.해.공군과 해병대는 로스앤젤레스에 각각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시나리오를 꼼꼼히 검토해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관행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알게 모르게 미국적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영화에 스며들 수밖에 없다.

"미군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모병과 병력 유지에 도움을 받는 기회로 영화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미 국방부의 할리우드 담당관인 필립 스트럽은 말한다.

할리우드의 상상력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꿈이 된다. 영화적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은 9.11 테러 직후 백악관은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들을 불러모아 후속 테러 가능성을 논의했다.

꿈은 숱한 영웅들을 만들어낸다. 영화 속의 영웅 터미네이터는 주지사가 됐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할리우드가 창조한 '탑건'신화에 의지해 조종사 복장으로 항공모함 위에서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했다. 이라크전의 부상병 제시카 린치 일병은 조만간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문화제국주의의 신화'를 쓴 미국의 문화산업 컨설턴트인 로버트 라우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개방된 사회가 가장 매력적인 대중문화를 갖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고 말한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 대중문화의 경쟁력은 이민국가 미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제약없는 개방성의 당연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더구나 유럽과 일본 자본이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금의 할리우드를 더 이상 미국 문화의 터전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지배당하는 자가 지배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효과적인 지배는 없다. 할리우드라는 '트로이의 목마'를 타고 '신제국' 미국은 이미 우리의 정신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할리우드(캘리포니아)=특별취재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배명복 기획위원, 김민석 군사전문위원, 심상복 뉴욕특파원, 김종혁.이효준 워싱턴 특파원, 김진.최원기 국제부 차장, 신인섭 사진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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