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예술가의 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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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기덕 감독이 구설에 휘말렸다. 이 정도면 영화계 최고의 설화(舌禍)요, 스캔들이다. 새 영화 '시간'이 좌초 위기 끝에 국내 개봉되면서 생긴 일이다. 해외 영화계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오직 '장사 안되는 감독'으로 외면받는 현실에 절망감을 털어놓은 게 발단이었다.

"앞으로 내 영화를 국내 개봉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은 큰 파문을 불러왔다. 극소수 대박 영화의 '스크린 싹쓸이'를 비판하며 '괴물'을 들먹인 것은 네티즌의 '공분'을 샀다. 파장이 커지자 그는 언론사에 '사죄문'을 보냈다. '괴물' 관련 발언을 사과하고 자기 비판을 덧붙였다. 거의 '자학' 수준이다. "내 영화는 모두 쓰레기다. 나야말로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고 심각한 의식장애자다. (한국 영화계에서) 조용히 물러가게 돼서 다행이다." 이번에는 무책임하고 감정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김 감독이 한국 영화계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으나 사실 그는 이미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계를 떠나 있다. 국내에서는 돈을 대는 사람이 없어 일본 등지의 자본으로 영화를 만든 지 오래다. 흥행 성적도 국내보다 해외에서 훨씬 좋았다. '반여성주의 이단아'로 낙인 찍힌 그의 작가 세계를 인정한 것도 베를린과 베니스 영화제였다. 그는 한국시장에 먹히는 감독이 아니라 '독창적 작가주의' 브랜드로 세계에 통하는 감독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극언에 가까운 일련의 발언들은 그간 국내 영화계와 불화해온 울분과 격정의 산물이다. 물론 그의 말은 부적절하고 세련되지 못했다. 그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상식과 규범의 눈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는 돌출 화법이다. 그러나 내부 검열 없이 마구 쏟아낸 직설적 언어들은 '야생'이라는 그의 작품세계와 맞닿아 있어 보인다. 어찌 보면 비상식과 궤변 속에서 예술적 자양분을 찾아온 그다운 말이다.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취임 직후 인터뷰에서 집무실 한쪽에 쌓아 올려진 서류 더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저런 공식적 언어, 관료의 언어를 쓰지 않겠다." 최초의 현장 예술인 출신 문화부 장관으로서, '정치인의 수사'가 아닌 새로운 언어를 쓰는 것을 소임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언어와 정치인의 언어는 다른 것이다. 이 전 장관의 시도는 값진 것이었지만 일반화돼서는 곤란하다. 국가대표급 예술가가 되면 외교적 화술이 부족한 것이 문제되듯이 정치인들이 마냥 격정의 레토릭을 구사하는 것도 문제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