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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씨구" 각설이 29년만에 '품바명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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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설이들에겐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고장에서 여는 대회인데다가 각설이하면 내로라하는 이들만 참가한 대회에서 최고수로 뽑혀, 정말로 기분이 좋습니다."

18 ̄20일 전남 무안군 일로읍에 있는 회산 백련지에서 개최된 제1회 무안 품바 명인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한 최길용(48.대전시 중구 태평동)씨.

이 대회는 제10회 불교문화대축제 행사 중 하나로 일로읍 개발청년회가 열었고, 전국 품바경연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는 8명이 참가해 흥과 신명을 겨뤘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판소리의 기본을 갖추고, 가사와 사설에 시대 흐름을 반영한 점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었다.

"이번 대회만큼은 꼭 1등 하고 싶었고, 한달간 따로 연습까지 했습니다."

최씨는 "거지 행세로 밥을 먹고 살지만 알 것은 안다"며 "무안군 일로는 품바의 발상지가 아니냐. 제1대 무안 품바 명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한 턱씩 쏘다 보니 장원 상금 100만원을 다 쓰고도 모자라 생돈까지 내놓았다"며 밝게 웃었다.

그가 각설이가 된 지는 올해로 29년째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에 다니던 열다섯살 때 집을 나왔다. 소리꾼이었던 아버지가 소리판에서 술을 먹고 와 어머니를 때리는 등 행패를 부리는 것이 싫었다. 또 아버지에게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한다며 매를 맞으며 소리 공부를 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가출 후 처음에는 점원과 공장 직공,배달부 등을 전전했다. 그러다 열아홉 살 때 전북 익산에서 각설이 '오천만'을 만났다.

"피는 못 속이는 법이고, 사주팔자는 어쩔 수 없는가 봅디다. 오천만 선생님을 따라다니던 것이 오늘까지 각설이로 살게 됐습니다."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전부였다면 누더기를 입고 깡통을 두드리며 노는 짓을 어떻게 30년 가까이 계속 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끼와 배우다 말은 판소리 밑천이 없었다면 벌써 그만두고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그는 한때는 목돈을 모아 술집과 음식점을 차렸지만 결국은 망했고, 본업 '거지'로 되돌아와야 했다.

'최민'이란 예명으로 품바타령과 트로트를 담은 테이프를 4집까지 만들기도 했지만, 고속도로 휴게소의 노점에서도 뒷전으로 밀리는 등 실패작으로 끝났다.

"진짜 사는 것이 거지같지 않으면 거지의 해학이 나올 수 없죠. 내 삶도 실제 품바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는 다섯명 이상 패를 이뤄 '오통'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혼자서 '똑딱이'를 하고 있다. 승합차에 엿판과 소형 손수레,스피커,북,찌그러진 깡통 등을 싣고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있다. 크고 작은 축제가 열리는 곳과 오일장이 서는 곳을 주로 찾아가 판을 벌인다. 회갑연을 비롯한 잔치집에 불려가 놀아 주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장소를 옮겨 다니는 생활이다 보니, 차 안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허다하고, 끼니를 라면으로 때우거나 아예 굶기를 밥먹듯이 한다.

또 날이 추워 축제 같은 야외 행사가 열리지 않아 갈 곳이 없는 겨울철에는 도시 유흥업소의 밤무대에 올라 취객들을 상대로 공연을 한다.

이처럼 각설이로 먹고 사는 사람이 전국에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는 대학교 3학년인 아들과 중학교 1학년인 딸을 두고 있다. 그는 "딸이 어렸을 때는 '각설이 아빠'를 창피하게 생각하더니,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해해 주는 것 같아 고맙다"고 했다.

"거지는 망해도 거지고, 흥해도 거지잖습니까. 이판사판 공사판에 공중전.지상전까지 다 겪어서 이제 겁나는 것도 없고, 사람들하고 즐겁게 웃으며 살다 갈 때 되면 홀연히 갈랍니다."

그는 "다른 돈벌이에 기웃거리지 않고, 품바를 계속 할 것"이라며 "가장 큰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구성진 가락으로 타령 한 대목을 뽑았다.

'당신 부모 당신 낳고, 우리 부모 나를 낳고, 곱게곱게 길러서 큰 사람 되라고 갈쳤더니, 각설이가 웬말이냐. 많이 주면 반 되빡에, 적게 주면 반 주먹. 니가 잘 나면 느그 에미, 내가 잘 나면 니 애비. 시경서경 읽었더냐, 유식하기도 참 잘하고. 논어맹자를 읽었더냐 대문대문 잘하고. 막걸리통이나 마셨더냐, 걸쭉하기도 잘하고. 기름종이를 먹었는지, 미끈하기도 잘하고. 기차화통을 먹었는지, 끔직하게도 잘하고. 냉수동이를 마셨는지, 시원하게도 잘한다.허이!'

◆'각설이들의 성지' 무안군 일로읍=지금은 품바 타령의 발상지를 알리는 표지석 하나만 달랑 있지만, 무안군 일로읍 의산리 888번지 공동묘지 아래에는 '천사촌'이 있었다. 1920년 목포항 부두에서 파업을 주동했던 천장근이 걸인 차림으로 도피하다 정착하면서 각설이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살았다. 그 수가 많을 때는 10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나 병든 노인을 데려와 동냥한 음식으로 보살피기도 했다. 또 가난한 집에게는 절대로 동냥을 하지 않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자는 얼굴만 내놓고 묻는 등 나름의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시절 주민등록법이 제정되자 연고지를 찾아 떠났고 구걸까지 금지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이곳 품바들의 이야기는 1982년 무안 출신 극작가인 김시라씨의 각색 .연출과 정규수(제1대 품바)가 출연한 품바 1인극이 무대에 올려지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연극은 국내.외 4000여회 공연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허어! 품바가 잘도 헌다! 에헤라! 품바가 잘도 논다!' 이 타령을 많은 사람의 귀에 익숙하게 만든 것이 이 연극이다.

글=이해석 기자,사진='광주드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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