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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집안단속이 열쇠(세계 석학이 본 「90년대」: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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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 내부 민족ㆍ경제적 폭발 요인 산적/동구,발전 모델 찾아 대한 접근 가속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브레즈네프,체르넨코와 같은 장로 정치가들의 뒤를 이어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했을 때 1968년 「프라하의 봄」 사태를 주도했던 당시 체코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즈데네크 믈리나르가 고르바초프를 가리켜 한 말이 있다.
『이 스마트한 친구는 위스키나 마시고 영어나 지껄이는 것 이상의 일을 할줄 아는 친구』라고 그는 고르바초프를 평가했던 것이다
모스크바대 재학시절 고르바초프와 유일하게 한방을 썼던 대학동료이기도 한 믈리나르의 이같은 예언은 그대로 맞아떨어져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되기 무섭게 소련의 개혁,세계와의 관계개선을 빠른 속도로 추진해나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가 과거의 소련 지도자들처럼 오로지 「악의 제국」의 이익만을 위해 그러는 걸로 생각하고 차가운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고르바초프가 과연 어떤 사람이냐는개인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그가 취하는 행동이 세계와 특히 동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냉정한 시선으로 지켜 보아왔다. 이를 테면 『결과를 보면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다』는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의 오래된 정리를 고르바초프에게 그대로 적용한 셈이다.
○고르바초프 효과도 이제는 효능 다한 셈
동구에 대한 고르바초프 효과는 우선 폴란드와 헝가리의 이탈을 자극시켰고,프라하­동베를린­소피아­부쿠레슈티로 이어지는 공산 보수진영의 위축을 가져왔다.
오늘날 고르바초프 효과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체코와 동독에서 일어나고 있는 요즘의 변화는 더이상 크렘린이 내세우는 「신사고」의 보호막 아래 몸을 숨길 필요가 없을 정도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변화는 1985년 이래 소련에 대한 동구 공산주의자들의 동조 정도를 나타내주는 용어가 돼온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의 범주를 이미 넘어선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1968년 체코 사태에 있어서처럼 「형제국」의 이탈을 진압하기 위해 그 동맹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구실로 이용돼왔던 브레즈네프 독트린 자체도 바르샤바조약기구 가맹국들에 의해 포기됐다.
유독 루마니아의 독재자만이 끝까지 이러한 변화를 무시한 채 진정한 공산주의자들로 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설하자고 북경과 아바나를 부르며 저항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그의 붕괴를 재촉했을 뿐이다.
이러한 엄청난 변화가 고르바초프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것이든,아니면 더이상 붉은 제국으로부터의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동구민중 자신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든 이같은 결과는 고르바초프 개인이라고 하는 수수께끼를 사람들에게 다시 제기하고 있다.
그의 등장 당시 일단 접어두었던 개인문제로 결국 되돌아온 셈이다. 한편으로는 공산주의가 분명히 해체되고 있지만 이같은 해체현상이 다시 역류하지 않는다는 절대적인 보장이 없는 이상 사람들은 고르바초프라고 하는 개인이 정말 진실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봐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몰타정상회담은 부시 미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의 선의를 가까이에서 확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지만 자유세계가 단지 이 사실만으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고르바초프 개인의 선의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는 불안정한 요소들이 소련 내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1990년대 세계를 말할 때는 소련내의 민족주의적ㆍ종족적ㆍ사회적 동인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1990년은 세계 양대블록 사이의 명백한 접근이 이루어지는 해가 될 것이다.
세계를 갈라놓았던 이념적 원심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양대블록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빠른 속도로 상호접근을 추진해나갈 것이다.
이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타진영의 기본골격을 채택한 폴란드와 헝가리는 핀란드식 정치ㆍ경제체제로의 급속한 전환을 이룩해나갈 것이며,이같은 변화는 양대블록 어느쪽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추운 겨울날씨에 제2의 「프라하의 봄」을 만끽하고 있는 체코는 국민의 혁명적 압력 아래에서 결국 새로운 균형점을 찾게 될 것이 틀림없다.
동독에서 전개되고 있는 혁명적 상황도 결국은 복수정당제에 입각한 민주정권의 탄생으로 가는 평화적 전환과정을 밟게될 것이다. 두개의 독일 사이에 작용하고 있는 자력과도 같은 상호 인력은 이같은 상황전개에 하나의 혼란 요인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동독 내부의 민주화에 장애요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 진전과 함께 소련 지도층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유럽공동의 집」도 신뢰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소련은 유럽에 있는 두개의 집,즉 동구의 집과 서구의 집을 결합시킴으로써 범게르만주의의 부활을 봉쇄하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놓을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주장이 예컨대 유럽인의 안보를 위해 동구의 집과 서구의 집 사이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자는 내용의 구체적 형태로 제시될 경우 이는 유럽의 여러나라를 심각한 외교적 혼란상태에 빠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고르바초프가 제시한 「제2의 헬싱키회의」가 실현될 경우 이는 고르바초프의 외교적 성과에 또 한번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동서 이념분단 해소 다원화 사고 새 주류
1990년은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양대블록의 접근이 구체화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미 고르바초프가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에서 시사한 바 있듯이 그가 구상하는 「공동의 집」은 유럽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이 앞마당이라면 역사적으로 소련의 중요한 관심지역이 돼온 아시아­태평양지역은 그가 생각하는 「공동의 집」에 있어 뒷마당이 되는 셈이다.
뒷마당에서의 변화는 우선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변화로 나타날 것이며 이는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소련은 자체사회내의 평화유지를 위해서도 타진영과의 다각적인 산업ㆍ통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관계는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와의 활발한 통상접촉으로 이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들이 처해 있는 것보다도 더욱 열악한 조건 아래서 경제기적을 실현시켰다는 명성을 듣고 있는 한국같은 나라는 경제재건의 모델을 찾고 있는 동구 여러나라들에 있어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공업국들과 동구 여러나라들과의 경제관계는 뚜렷한 진전을 이루게 될 것이다.
1990년대는 또 세계질서의 다원화 현상이 가속화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몰타정상회담에서 세계양대 초강대국의 지도자가 말했듯이 이제 냉전은 끝났다. 적어도 냉전시대의 대립적ㆍ이분법적 사고방식은 90년대의 세계질서에서 그 효율성을 상실하게 됐다. 다원적이고,다자적인 사고가 세계질서를 형성하는 준거가 될 것이다.
전후 45년간 유럽을 지배해온 냉전질서와 그 결과로서의 유럽분단은 90년대를 맞아 다자적 사고의 틀 속에서 극복돼나갈 것이다.
이미 동구 여러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념적 이질화 현상은 동과 서 사이의 이념적 이질화 현상은 동과 서 사이의 이념적 분단을 급속히 해소하고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대립적이 아닌 상호보완적이고,선의의 경쟁적인 다양한 정치체제의 존재를 가능케 할 것이다.
이는 또 그동안 미국과 소련을 서로 다른 두개의 축으로 해서 형성돼왔던 정치ㆍ경제ㆍ군사적 동맹체들이 점차 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거센 동구혁명 자체소멸 가능성도
특히 유럽이 계획대로 오는 1993년 시장 단일화에 성공하고 이어 경제ㆍ통화적 동맹까지 이룩할 경우 세계질서의 다원화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경제적 통합은 정치적 협력이 뒷받침될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유럽통합은 결국 정치적 통합논의로까지 확대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냉전질서가 끝나고 다원적 질서를 향해 세계역사는 새로운 출발을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에선 1990년은 또한 고뇌의 한해가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또 당분간 그것을 주도해나갈 장본인인 고르바초프 개인이 감당해야 할 소련 내부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90년대를 희망적으로 보는 것은 고르바초프 개인의 선의와 그의 국내적 선전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민족주의적ㆍ종족적ㆍ사회적 동인에 비추어 90년대의 출발점에서 그가 극복해야 할 위험과 시련은 실로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사고」의 범주를 이미 벗어나 급속히 전개되고 있는 동구의 혁명적 상황들이 통제 불능의 운동력에 의해 자체소멸될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 초강대국의 두 정상이 몰타해상에서 만나 제2의 얄타협정을 체결하려던 당초의 시나리오가 「예상밖에」 지중해에 몰아친 폭풍우 때문에 무산됐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하지만 과연 소련 내부에 들끓고 있는 민족주의적ㆍ사회적 운동력이 내포하고 있는 「예상밖의」 요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농담을 할 수 있을지 어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르바초프가 일종의 비상대권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마저 소련에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고르바초프가 추진해온 세계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련 자체내에서 터져나올 수 있는 위기적 상황을 다스릴 수 있는 예외적인 수단을 고르바초프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소련의 대표적 지식인 가운데 한명인 안드레아니크 미그라니안 세계 사회주의체제연구소장 같은 이가 『70년 전체주의가 아직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전제주의적 토대 위에 벌써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민주주의를 쌓고 있는 꼴』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소련 내부의 역설적 상황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스꽝스럽게 여겨질지 몰라도 1981년 12월13일 야루젤스키가 선포했던 계엄령에 대해 그토록 분개해마지 않았던 자유세계가 앞으로 고르바초프가 취할지도 모르는 비상조치에 대해 내놓게 될 반응은 「안도의 한숨」일 거라는 점은 엄연한 현실이다.
80년대 후반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90년대에 있어서도 자유세계가 고르바초프에게 거는 기대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불 조르주 밍크교수/불 소장 지식인 선두주자… 동구문제 전문가
프랑스 소장파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조르주 밍크교수(43)는 동구문제 전문가로 동구개혁 흐름을 예리하게 분석해왔다.
파리정치학연구소(시앙스포) 교수이자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동구문제전문연구원직을 맡고 있는 밍크교수는 특히 폴란드 문제에 정통한 국제문제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구사태가 급변하고 있는 요즘 서방측의 대응자세에 필요한 각종 정보와 자료를 밍크교수는 신문기고등을 통해 제공해왔다.
동구사태의 본질을 갈파하고 동구 정치ㆍ사회사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는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그는 프랑스 국립자료원 동구담당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얻은 정보와 자료를 십분 활용해 라디오 프랑스의 국제담당운영위원의 까다로운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지난 70년과 71년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시앙스포에서 사회학박사와 정치학박사를 잇따라 수여받은 밍크교수는 프랑스 사회당 일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는 참여파 학자다.
저서로는 『폴란드 정상화 논리분석』(85년) 『무력인가 이성인가:폴란드 정치ㆍ사회사』(89년)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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