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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골프이야기] "신익희, 여운형, 조병옥은 명 연설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코노미스트때마침 7월 26일 재.보선이 있던 다음날이었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재.보선 결과로 이어졌다. 좀처럼 정치 얘기를 꺼내지 않던 JP도 조순형 의원이 서울 성북을에서 당선된 것에는 다소 흥이 나는 것 같았다.

JP는 조 의원과의 인연을 얘기하면서 조 의원의 선친인 조병옥 박사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

"1952년이었어요. 당시 조 박사는 대구에서 의원 선거에 나왔어요. 대구에 가면 중앙통이라는 거리가 있는데 거기 끝쯤에 파출소가 하나 있었어요. 내가 미국 유학 갔다가 대구에 갔었는데 마침 조 박사가 선거 유세를 한다고 해서 중앙통 앞으로 갔어요. 후보자로는 조 박사와 변호사 한 사람, 교장 선생 출신 한 사람, 사업가 한 사람 이렇게 4명이 었어요. 그런데 세 사람이 일제히 조 박사를 비난하는 거예요. 조 박사가 인기가 좋으니까 선거전략상 그랬겠지. 비난 내용이 조 박사는 군정경찰을 지냈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거야. 아주 막무가내예요. 그러면서 조 박사가 마침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나오니까 또 그 사람들이 '팔은 왜 부러졌는지 모르지만 팔 부러져서 무슨 선거에 나오느냐'고 일제히 또 비난이에요. 그래서 조 박사가 팔 부러진 사연을 해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단 말이에요."

JP는 말을 이어갔다.

"조 박사 연설이 걸작이에요. '사실 어젯밤에 내일 유세장에 나가지 말고 선거 포기하라고 이승만이가 깡패를 보냈는데 내가 싸우다 팔이 부러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죠. 그러면서 하나 하나씩 대꾸를 하는 거예요. '여기 교장 선생님은 국회의원 한다고 나오시지 말고 애들 교육이나 잘 시켜라, 변호사는 몰라서 억울하게 사법의 피해를 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여기 나올 정신이 어딨느냐, 기업 하는 사람한테는 정치 같은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장사나 잘해 돈 벌어서 사람들이나 먹여 살려라'고 막 몰아붙이는 거 아니겠어? 그러면서 '정치라는 건 나처럼 할 일 없는 사람이나 하는 거요. 나가지 말라고 깡패 시켜서 내 팔을 분지르는 이승만이나 팔 부러져가면서 나가겠다고 단상에 올라가서 소리지르는 나나 다 똑같은 놈인데 그런 일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하는 거야' 이러는 거 아니겠어요? 청중들이 파안대소하면서 박수를 막 치는 거예요. 그때 조 박사가 전국 최고 득표를 했어요. 참 멋있잖아요. 재치가 있고, 해학이 넘치고…."

"요새는 배꼽에도 귀걸이 달고 다니더구먼"

JP는 요즘의 삭막한 정치 환경이 못마땅한 듯했다. 유세장에서도 확성기만 떠들고 사람이 없는 요즘 세태에 비춰보면 예전 선거는 어쨌든 잔치였다.

"그때는요, 유력한 정치인이 연설을 하면 밑에서 '옳소, 옳소' 이러는 소리가 막 나왔어요. 이번 재.보선도 투표율이 20% 조금 넘는 다는데 그게 뭐예요. 그래서 대표성이 있겠어요? 요새는 명연설도 없고, 낭만이나 풍자도 없어. 오로지 서로 험담만 하지…."

JP에게 명연설가를 물었다.

"신익희씨나 여운형씨가 참 명연설가들이에요. 웅변가들이지…. 특히 여운형은 우리가 대학 다닐 때 몇 번 봤는데 얼굴도 잘생기고 똑똑했어요. 그런 사람이 해방 직후에 좋은 자리 좀 했으면 좋았는데…. 그분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랬잖아요. 좌우 대립이 심할 땐데 그러니 양쪽에서 다 버림받은 거야. 그때는 정의고 불의고 없어요. 선명하지 않으면 그냥 가는 거예요. 김구 선생도 그랬어요. 김구 선생이 오해 살 일을 좀 하시긴 했지…. 그때 당시는 김구 선생이 조금 더 왔다 갔다 하면 남한을 이북에 맡긴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하여튼 김구 선생의 죽음은 지금도 미스터리입니다. 다만 원형덕 헌병사령관이 관련있다는 건 정설이죠."

모두 해방 직후의 얘기들이다. JP는 당시 대학생이었다. 대학생들도 좌우 대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때 내가 속해 있는 것은 학연(학생연맹)이고, 공산주의자들은 학통(학생통일전선)이었어요. 학연은 고려대의 이철승씨가 총사령관이었어요. 만날 학연하고 학통하고 싸우는 거예요. 학생들이 학교에서 그렇게 싸웠어요. 그때 학통 후예들이 지금의 운동권이나 반체제 운동으로 이어진 거 아니에요? 그게 언제적 얘긴데 아직까지 나라가 이렇게 싸우는지…. 아직도 그때처럼 공산주의 사상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람이 한참 뒤떨어진 거죠. 중국도 사실 체제는 공산주의지만 하는 짓 보면 자본주의 뺨치잖아요. 김정일이만 만날 저러고 있는 거지."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JP는 어느새 흥분했다. 밉든 곱든 JP 나이 정도나 돼야 북한에 대해 흥분이라도 하지 요즘 사람들은 사실 북한이 핵 개발을 했다 해도 무관심 일색 아닌가?

"요새 젊은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잘 몰라요. 자기 꾸미기에 바쁘지. 요샌 뭐 길거리에 가보니까 또 배꼽에도 귀걸이 같은 걸 달고 다니더구먼. 참, 옛날에는 배꼽도 예쁘게 안 생겨서 숨기고 다녔는데 요샌 기술이 좋아요. 요새는 불주사(우두주사) 자국도 안 남는다며?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어요. 우두주사를 도입한 분이 지석영 박사잖아요. 그 지석영 박사 손자로 지세창 박사란 분이 있어요. 내가 6.25사변 때 19연대에서 중공군이랑 싸웠잖아요. 전투가 치열하니까 매일 한 사람 내지 두 사람은 죽어요. 부상병도 많죠. 전쟁 통에 마취가 어딨어요? 그냥 수술해요. 환자도 고역이지만 의사도 못할 짓이지. 지세창 박사가 매일 술에 절어 사는 거야. 내가 거기서 보니까 맨 정신에는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장교 몫으로 나온 술을 매일 지 박사에게 갖다줬어요. 그때 인연으로 5.16 후에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를 지 박사로 했어요. 박 대통령이 장이 안 좋으셨거든, 마침 지 박사가 내과니까 주치의로 소개해 줬어요. 주치의는 내과만 있으면 돼요."

나카소네와의 선술집 추억

JP는 매년 8월 1일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와 일본에서 골프 회동을 갖는다.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지일파로 꼽히는 JP의 경력은 이런 일본 친구들로부터 비롯됐다. 기자와 만난 다음날 JP는 이 행사를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자연히 얘기는 나카소네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48년에 패전을 맞습니다. 나카소네가 해군 대위였을 때죠. 패전을 당한 군인이 할 일 있겠어요? 그래서 포경선을 탑니다. 그때는 포경 사업이 대단했어요. 포경선을 타고 남극까지 간 사람이에요. 그래서 일본에서 '야,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해서 화제가 됐고, 나중에 방위청 장관이 됐어요. 그 사람 참 소탈해요. 하루는 내가 도쿄에 있을 땐데 쪽지가 왔어요. 자기랑 술 한잔 하자고. 그래서 도쿄 어느 술집으로 찾아갔어요.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하는데 구석으로 안내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곧 마담이 와서 '한국에서 귀빈이 오셨는데 몰라봐서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는 거예요. 좀 있다가 나카소네가 와서 '왜 조용하게 한잔 하려는데 이렇게 법석을 떠느냐?'고 막 혼을 내는 거 아닙니까? 마담이 자꾸 왔다 갔다 하니까 사람들이 쳐다보고 술맛이 떨어진다데….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얼씬도 안 하더라고요. 참…."

JP는 당시 그 술집이 화려하지 않은 아담한 그런 술집이라고 기억했다.

"어느 건물의 5층이었는데 넓었어요.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안 보일 정도였어요. 물론 당시 도쿄에는 유명한 기생집도 많았지…. 그런 집은 오후 3시쯤부터 택시, 자가용이 범벅이 돼요. 나도 몇 번 가봤는데, 지금은 그런 집이 싹 없어졌어요. 아직도 전통적인 집이 도쿄에는 몇 개 있긴 있어요. 그런 데는 세무서에서 좀 돌봐줘. 소위 게이샤집 말이에요. 이걸 그쪽에서는 일종의 전통문화로 보고 세무서에서도 봐준답니다. 우리는 그런 거 없애려고 야단인데…. 우린 못 견뎌요. 그렇다고 그런 집이 다 없어져요? 오히려 더 이상한 술집만 생기는 거지…. 요즘 강남 가봐요. 초미니 스커트 입고 다리 다 드러내놓고 그런 걸 룸살롱인지 뭔지 이름붙여 놓고…. 그게 뭐야 도대체! 사실은 치마 저고리 입고, 다소곳이 예의를 지키면서 손님과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의 여성들과 어울리는 것이 제대로 된 유흥이에요. 그런 낭만이 없어, 참…."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前] 내무부 장관(제5대)   *사망

1894년

[前] 민국당 최고위원   *사망

1894년

[前] 조선건국연맹 위원장   *사망

1886년


이석호 기자 (lukoo@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 8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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