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규환 카불 공항이 되살렸다…‘인계철선’ 주한미군 존재감

중앙일보

입력 2021.08.18 05:00

업데이트 2021.08.18 16:23

지난해 10월 열린 북한 노동당 창건일 열병식에서 북한군이 입장하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지난해 10월 열린 북한 노동당 창건일 열병식에서 북한군이 입장하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하면서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는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1975년 베트남전 패망 당시 미군이 사이공을 떠날 때 벌어진 ‘필사의 탈출’과 다름없다. 1950년 미군 군함을 타고 북한을 탈출하는 '흥남 철수'도 연상하게 한다.

아프간 미군 빠지자 '흥남철수' 방불
한반도는 주한미군이 인계철선 역할
北, 제2의 남침 땐 미국과 전쟁 선택
美, “아프간과 달리 철수 이유 적어”

‘강 건너 불구경할 사안이 아니다’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한국에서도 나온다. 주한미군이 갑자기 철수할 경우 한반도 안보 불안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카불 국제공항에서 아프가니스탄 피난민들이 미 공군기를 쫓아가며 탈출 시도를 하고 있다. 트위터 영상 갈무리

카불 국제공항에서 아프가니스탄 피난민들이 미 공군기를 쫓아가며 탈출 시도를 하고 있다. 트위터 영상 갈무리

한반도에선 이미 ‘미군 부재’를 경험했다. 1950년 6월 북한의 기습적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미국이 ‘애치슨 라인’을 설정하며 미군을 철수시켰던 오판의 결과였다.

전쟁의 공포는 파급력이 크다. 1994년 북핵 위기가 커진 가운데 남북 회담에서 북측 인사가 ‘서울 불바다’ 위협을 꺼내며 대중의 불안감을 촉발했다. 당시 라면을 비롯한 생필품을 사재기가 속출했다.

미국의 대외 정책에 따라 점점 줄어든 주한미군 규모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미국의 대외 정책에 따라 점점 줄어든 주한미군 규모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당장 내일이라도 그때와 같은 위기를 반복하면 주식시장은 붕괴하고 환율(원화값)은 폭락하는 등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한국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고 우려하는 배경이다.

이같은 ‘전쟁 공포’를 차단하는 실질적·심리적 방파제가 주한미군이다. 주한미군은 한국군 대비 5% 수준임에도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안보 불안을 통제하는 안전판이 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최대 32만 5000명까지 늘었던 병력은 2006년 이후 2만 85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주한미군은 단순한 병력 숫자로 드러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난 4월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에서 U2 고고도정찰기가 임무를 마친 뒤 착륙하고 있다. 뉴스1

지난 4월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에서 U2 고고도정찰기가 임무를 마친 뒤 착륙하고 있다. 뉴스1

주한미군 숫자 ‘28500’의 뒤엔 엄청난 ‘+α’가 있다. 숫자에는 노출되지 않지만 미군이 제공하는 대북 정찰 및 감시 정보는 한반도 방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군은 첩보위성으로 24시간 북한 전역을 촘촘하게 살펴보고 엿듣는다.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은 대체 자체가 불가능하다. 유사시엔 미국 본토에서는 ‘2만 8500명의 수십 배’의 증원 병력이 한반도로 출격한다.

‘2만 8500명 주한미군’전쟁은 ‘군사력 1위’ 미국과 전쟁

이때문에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다는 사실 자체가 갖는 의미가 무겁다. 미국의 한반도 안보공약을 가장 강력하게 상징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제2의 6·25전쟁을 일으켜 남침할 경우 이번엔 곧바로 미군과 싸워야 한다. 이처럼 '내려오면 미국과의 전쟁'이라는 실질적 장치가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은 그 자체로 숫자 '2만8500명'을 뛰어넘는 억지력을 갖고 있다.

평택 이전 후 주한미군 주둔지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평택 이전 후 주한미군 주둔지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미군이 떠나면서 만들어진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미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신호가 나오자 공세적으로 움직였다. 만약 미군이 카불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면 탈레반이 수도 진군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 때문인지 북한은 끊임없이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한다. 지난 10일에도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담화에서 “미국이 한국에 전개한 침략 무력과 전쟁 장비들부터 철거”하라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미군을 뺀 뒤 그 공백을 파고들겠다는 의도가 여전하다.

지난 2019년 경북 포항 수성리 해병대 훈련장에서 실시된 한·미 해병대 연합 공지전투훈련 중 장병들이 KAAV 상륙돌격장갑차에서 내려 침투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9년 경북 포항 수성리 해병대 훈련장에서 실시된 한·미 해병대 연합 공지전투훈련 중 장병들이 KAAV 상륙돌격장갑차에서 내려 침투훈련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안보 전문가들은 미군이 철수해도 아프간과 한국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군은 아프간의 오합지졸 군대와는 달리 체계화된 훈련과 지휘 체계로 전쟁 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1950년 여름 낙동강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던 그때와 달리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논의할 수준까지 성장했다.

미·중 경쟁 구도, 당장 철수 안해

무엇보다 아프간과 한반도의 가장 큰 차이는 한반도엔 미국의 국익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이 사라질 경우 동북아 불안으로 이어져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데다 한반도의 주한미군은 주둔 자체로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견제하는 부수적 효과도 내고 있다.

지난 5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기지 인근 도로에서 사드 반대 집회에 참여한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이 기지로 들어서는 길목을 막고 시위하고 있다. 사드 철회 소성리 종합상황실 =연합뉴스

지난 5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기지 인근 도로에서 사드 반대 집회에 참여한 주민과 시민단체 회원이 기지로 들어서는 길목을 막고 시위하고 있다. 사드 철회 소성리 종합상황실 =연합뉴스

정한범 국방대학교 교수는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해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에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려있다”며 “주한미군이 당장은 철수 불가능한 게 아프간과의 차이”라고 말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어 주한미군의 역할과 기능도 중국 견제 역할로 전환된다”며 “앞으로 더 많은 동맹의 역할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럼에도 이번 아프간 미군 철군의 교훈은 '자주 의지가 없으면 미국도 국익을 포기한다'는 데 있다. 16일(현지시각)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미국의 국익과 관계없는 다른 나라 분쟁에 주둔하며 싸우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서 “아프간군은 스스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고 철군 배경을 설명했다. 이런 나라에선 1년을 주둔하건 5년을 주둔하건 변화를 만들 수 없다는 취지였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합참의장은 “싸울 의지가 없으면 미군이 도와줄 수가 없다는 교훈을 무겁게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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