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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후가 만든 소설? 1816년 프랑켄슈타인이 태어난 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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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셸리 일행의 1816년을 다룬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사진 영화사 찬란]

메리 셸리 일행의 1816년을 다룬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사진 영화사 찬란]

1816년 여름, 훗날 영국 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이름을 남기게 될 메리 고드윈은 유부남 연인 퍼시 셸리와 스위스로 밀월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제네바 인근의 별장에서 낭만파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바이런과 합류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해 여름은 날씨가 매우 괴팍했습니다. 온도는 터무니없이 낮았고, 종일 비가 내려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며칠씩 이어지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했습니다.
풍광이 아름다운 스위스까지 온 메리는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요. 그녀가 영국에 보낸 편지를 보면 “거친 폭풍우가 몰아친다” “거의 잠시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비가 내려서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어" "갑자기 번쩍하고 온 사방을 비추는 빛이 스치고 지나간 뒤, 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어. 그러고는 머리 위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어” 등 당혹스런 감정이 드러납니다.
바이런 역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대낮에도 어둡기 짝이 없거든. 점심때 벌써 닭들은 밤이 온 줄 알고 자러 들어가더군. 대낮에도 한밤중처럼 촛불을 밝혀야 한다네"라고 남겼습니다.

1816년 6월 18일 기괴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로 한 메리 셸리 일행.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사진 영화사 찬란]

1816년 6월 18일 기괴한 이야기를 주고받기로 한 메리 셸리 일행.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사진 영화사 찬란]

이런 우중충한 분위기에서 6월 18일 파티가 열립니다. 퍼시 셸리와 바이런의 만남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날 밤 메리와 퍼시, 바이런, 그리고 바이런의 연인이자 메리의 여동생인 클레어, 바이런의 친구인 의사 존 폴리도리는 재미있는 '게임'을 제안합니다. 폭풍우와 변덕스러운 날씨로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있던 탓일까요. 지루한 시간을 날려버릴 기괴하고 섬뜩한 기담을 하나씩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죠.

분위기에 심취한 메리는 폭풍우가 치는 밤 한 과학자가 시체를 모은 뒤 전기의 힘으로 되살려 괴물을 만들어낸다는 스토리를 내놓았고, 폴리도리는 사람의 피를 흡입하는 흡혈귀에 대한 착상을 소개했다가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허겁지겁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이날 밤은 오랫동안 문학사가들의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혹자는 이들이 어울려 마약을 했고 성적 쾌락을 탐했다고도 하는데, 그 사실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바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탄생한 밤이라는 것이죠.

1931년 제작된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터 [중앙포토]

1931년 제작된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터 [중앙포토]

이날 바이런과 퍼시 셸리는 메리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녀에게 소설로 쓸 것을 권했고, 2년 뒤인 1818년 『프랑켄슈타인』이 출간됩니다. 다만 당시에 여성이 진지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기에 익명으로 내놓게 됩니다. 폴리도리 역시 이듬해인 1819년 흡혈귀가 등장하는 최초의 소설 『뱀파이어』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메리 고드윈은 퍼시 셀리와 뷸륜 관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결혼했고 메리 셸리로 불리게 됩니다.
(1816년의 기묘한 여름밤과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배경을 다룬 뮤지컬 '메리 셸리'도 7일 막을 올렸습니다.)

1931년 영화 '드라큘라' 포스터, 우리가 흔히 아는 흡혈귀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앙포토]

1931년 영화 '드라큘라' 포스터, 우리가 흔히 아는 흡혈귀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앙포토]

1816년 끔찍한 여름을 보낸 것은 스위스의 메리 셸리 일행뿐이 아니었습니다. 이 해는 유럽의 역사에서 '여름이 없었던 해(Year without a summer)'라고 불립니다. 유럽 나라 대부분이 이상 저온, 폭풍우, 장마, 홍수 등을 겪었습니다. 연초부터 계속된 저온현상은 농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대규모 기근을 초래했습니다.

이 해 5월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에서는 무장한 노동자들이 "빵이 아니면 죽음을(Bread or Blood)"가 적힌 깃발을 들고 봉기를 일으켰고,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도 계속된 장마로 곡물이 썩어버리는가 하면 와인 생산은 수백 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자바의 총독이었던 스탬퍼드 래플스는 이때 유럽을 방문했다가 충격을 받아 "걸어 다니는 해골 같은 사람들이 먹기에도 끔찍한 가축의 사체나 냄새가 고약한 쐐기풀을 게걸스레 먹어댄다. 길가에 버려진 음식물을 차지하려 동물들과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사진NCC]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사진NCC]

내륙 국가라서 바닷길을 통한 통상이 어려웠던 스위스는 더욱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 해 8월엔 빵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고, 이듬해에는 곡물 가격이 3배 이상 치솟아 굶주린 군중들이 빵 가게를 약탈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스위스에 있던 퍼시 셸리와 바이런은 “정신이 나간 듯한 아이들은 모두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대부분 등이 굽고 목이 부어 있었다”며 당시의 재앙 같은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이런 충격적인 모습은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의 형상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바이런은 '암흑(Darkness)'이라는 시에 이때 받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빛나던 태양은 빛을 잃었고, 별들은 빛도 없고 길도 없는, 끝없는 우주 공간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네. 얼음처럼 차가운 지구는 달도 없는 허공에서 눈이 먼 채 제멋대로 선회하며 어두워져 갔네. 아침이 왔다가 갔네-또 왔지만, 낮은 오지 않았네…인간들의 이마가 절망의 빛으로 무시무시한 모습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네. 어떤 자들은 드러누워 눈을 가리고 울었네. 어떤 자들은 꽉 쥔 손 위에 턱을 괴고 미소를 지었네. 또 어떤 자들은 이리저리 서둘러 왔다 갔다 하며, 그들의 화장용 장작더미에 땔감을 보태며, 미칠 듯이 불안하게, 사라진 세상의 관을 덮어주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네." ('암흑' 中)

영국의 화가 존 컨스터블이 1816년 여름 신혼여행 갔던 영국 남부 해안가에서 그린 '웨이머스 베이'. 화산재의 영향으로 하늘이 어두컴컴하다. [사진 소와당]

영국의 화가 존 컨스터블이 1816년 여름 신혼여행 갔던 영국 남부 해안가에서 그린 '웨이머스 베이'. 화산재의 영향으로 하늘이 어두컴컴하다. [사진 소와당]

윌리엄 터너가 그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 상상화.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로마의 고대 도시 폼페이를 화산재에 묻히게 했다. 기후학자들은 탐보라로 인한 이상기후 때문에 하늘의 빛깔이 다양하게 바뀌었는데 이것이 당시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사진 소와당]

윌리엄 터너가 그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 상상화.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로마의 고대 도시 폼페이를 화산재에 묻히게 했다. 기후학자들은 탐보라로 인한 이상기후 때문에 하늘의 빛깔이 다양하게 바뀌었는데 이것이 당시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사진 소와당]

우연한 자연재해 정도로 여겨졌던 1816년의 비밀이 풀린 것은 약 150년가량이 지난 뒤입니다.
기후학자들은 지구 반대편 인도네시아 숨바와 섬의 탐보라 화산을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탐보라 폭발은 삼각형 모양의 산머리의 1600m 높이 부분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지름 6㎞ 규모의 칼데라호를 남겼고, 용암은 주변 560㎞까지 흘러내렸습니다. 1만2000년 이래 최대규모 화산 폭발로 알려져 있습니다.

탐보라 폭발이 어떻게 유럽에 재앙을 안겼을까요.
화산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산 분출물과 가스가 40㎞ 이상 치솟으면서 성층권에 도달했고, 이것이 에어로졸을 형성하면서 햇빛을 차단하고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교란했습니다.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이때 만들어진 화산 분출물은 50㎞³에 달했는데, 이는 20세기 최대로 꼽히는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에서 만들어진 규모의 6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에어로졸로 인한 '우산효과'는 서서히 이동하며 약 3년 동안 지구를 이상저온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탐보라 화산 [중앙포토]

탐보라 화산 [중앙포토]

당시 이 변화를 심상치 않게 여겼던 학자 루크 하워드는 이상 기후 현상을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1816년 4월~9월 강우일수가 130일에 달했고, 런던의 낮 평균 기온이 섭씨 10도(1807~1815)에서 섭씨 3.3도(1816)로 무려 6.7도나 떨어졌음을 확인했습니다. '여름이 없었던 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때문에 서유럽 전역에서 곡물 생산이 급감해 예년에 비해 수확량이 75%가량 감소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것은 유럽만이 아닙니다. 탐보라 화산 폭발은 인도양 일대 해수의 수온과 염도에도 변화를 가져왔고 이것은 동물성 플랑크톤의 급증과 이를 숙주로 삼는 콜라라균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수로 콜레라균으로 가득한 해수가 해안가를 덮쳤고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로 퍼진 뒤 무역로를 따라 필리핀, 일본, 중국까지 확산했습니다. 1821년(순조 21년) 조선에 창궐한 괴질은 바로 이 때 퍼진 콜레라가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19세기 팬데믹으로 불립니다.

"평양부(平壤府)의 성 안팎에 지난달 그믐 사이에 갑자기 괴질(怪疾)이 유행하여 토사(吐瀉)와 관격(關格)을 앓아 잠깐 사이에 사망한 사람이 10일 동안에 자그마치 1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의약도 소용없고 구제할 방법도 없으니, 목전의 광경이 매우 참담합니다…그 돌림병이 그칠 기미가 없고 점차로 확산될 염려가 있어 점차 외방의 각 마을과 인접한 여러 고을로 번지고 있습니다." (『순조실록』21년 8월 13일)

탐보라가 일으킨 나비효과는 유럽 사회의 정치 사회적 변화로도 이어졌습니다. 식량 부족과 사회 혼란을 통제하면서 유럽 각국 정부는 점차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화됩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에 중앙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빅 브라더'의 징후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거나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침해된다는 반발과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 기사는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소와당),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예지)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역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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