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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강수의 시선

진실은 증거 속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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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지지자들이 지난달 26일 경남 창원시 마산구 창원교도소 앞에서 재수감되는 김 전 지사를 응원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사법부에서) 외면당한 진실이지만 언젠가는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1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지지자들이 지난달 26일 경남 창원시 마산구 창원교도소 앞에서 재수감되는 김 전 지사를 응원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사법부에서) 외면당한 진실이지만 언젠가는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1

'차창, 찻, 차르르르~ 우와.'
 110㎝ 길이의 날카로운 검 두 개가 부딪히는 소리에 이어 국가대표 펜싱 선수의 환호성이 경기장을 찢어놨다. 환호는 잠시, 상대 선수가 득점했다는 판정이 나오자 승복하기 어려웠던지 즉시 심판을 향해 손으로 직사각형을 그려 보였다. 비디오 판독을 통해 오판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다. 0.03초 이내의 순간에 승부가 갈리는 경기니 그럴만하다 싶었다. 심판이 포착하지 못한 사각지대의 찰나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펜싱뿐만이 아니었다. 도쿄 올림픽 중계방송에서 선수나 감독이 직사각형을 그리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구기 종목인 야구·축구·배구·배드민턴, 격투기 종목인 태권도·유도에서도 비디오 판독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판독에 걸리는 시간이 남은 경기 시간에 필적할 만큼 긴 경우도 있었다. 심판 판정에 의구심을 제기했던 선수와 감독은 비디오 판독 결과가 나오자 승복했다. 불가역적인 최종 판정으로 받아들였다. 국제 스포츠계의 대세로 자리 잡은 비디오 판독은 오류로 판정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사람 심판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제다.
 비디오 판독 장면을 보면서 1·2심은 말할 것도 없이 대법원 판결이 나와도 진보·보수로 갈려 아무도 승복하지 않는 국내 재판의 현실이 오버랩됐다. 당사자가 승복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면 차선의 재판은 어떤 것일까. '비디오로 찍은 듯이 생생한 증거 중심의 재판' 구현이 아닐까.
 예컨대 2017년 대선 댓글 여론 조작혐의로 최근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의 확정판결을 받고 재수감된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사건은 시금석이 될만하다. 그는 1·2·3심 내내 닉네임 '드루킹'(김동원)에게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허익범 특검의 디지털 포렌식 결과 및 대법원이 인정한 사실(fact)과는 간극이 컸다. 재판부는 그가 30여 차례나 드루킹에게 먼저 연락해 댓글 작업을 할 기사 링크를 보내고 실행케 했다고 봤다. 킹크랩 시연회에 참석해 댓글 조작을 허락한 것도 팩트로 인정했다. 과학적인 증거 앞에서 공모관계가 아닌데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느냐는 감성적 호소는 공허했을 것이다.
 대법원 판결 직후 김경수는 "진실은 아무리 멀리 던져도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했다. 주관적 진실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객관적 진실은 하나뿐이고 증거 속에 있다. 청와대와 여권 인사들은 "착한 경수가 그럴 리 없다"며 도리질을 쳤다. 착한 경수, 나쁜 드루킹 프레임?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다.
 착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통념은 오래전 깨졌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했을 때다. 유대인 수백만 명을 수용소로 이송시킨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악마적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관료'였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국가의 지시를 따랐으니 무죄라는 거였다.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아이히만의 궤변은 '친노 대모'로 통하는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2015년 대법원에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직후 발표한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저는 무죄"라는 입장문 대목을 연상시킨다. 대법원까지 유죄를 선고한 이유는 뇌물 중 일부가 동생의 전세자금으로 쓰이는 등 물적 증거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취임 이후 명예 회복 차원의 재수사를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팩트의 장벽을 넘지 못한 채 중도 포기한 것도 그래서다.
 정경심 동양대 교수는 어떤가. 1심에 이어 어제 항소심에서도 딸의 7가지 입시용 스펙 조작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가 선고됐다. 범죄 사실이 구체적으로 증명이 된다는 의미다.
 "재판이란 원래 최종적인 정의에 도달하려는 목적을 가진 절차가 아니다. 판사가 모든 악인을 처벌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최선을 포기하고 차선이라도 건지기 위해 고안한 시스템이 재판이다. 형사소송법상의 절차만 지키면 못해도 중간은 간다. 법과 절차는 프로그램이다. 권력도 프로그램을 깨뜨릴 수 없다."(도진기 변호사, 추리소설가)
 한명숙·김경수·정경심 재판부의 어느 판사도 명백한 물증 앞에서 달리 판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게 프로그램의 힘이다. 법과 원칙에 따르지 않았다가 나중에 직권남용의 화를 당할 수 있음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이 살아있는 권력의 유무죄를 논할 때 공정한 판결의 견인차가 된다면 그 또한 반가운 쓰임새 아닌가.

김경수·한명숙 이어 정경심도 실형 #객관적 물증 명백, 다른 판결 못해 #'비디오 판독' 닮은 증거 재판 지향

조강수 논설위원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