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철희의 한반도평화워치

북한이 요구한다고 안보 태세 이완할 이유는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대북 전략에 보이지 않는 것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겸 국제학연구소장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겸 국제학연구소장

지난달 27일 14개월 만에 남북 통신선 복원이 이루어진 이후 한반도가 요동치고 있다. 북한이 필요한 게 있으니 먼저 움직였을 것이다. 식량 부족 문제 개선과 코로나 방역에 필요한 백신 도입, 그리고 북한 경제를 옥죄는 제재 완화의 필요성이 북한에는 시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 오히려 한국을 압박하는 형세이고, 한국 정부는 굽신거리는 모양새다.

북한이 한·미 방위동맹 흔드는데 정부·여당 나서서 맞장구 #한·미 연합훈련 축소에 북한은 등가적 행동 전혀 취하지 않아 #북한 비핵화 목표로 북한의 상호주의적 행동 이끌어내야 #“북한이 안 바뀌니 우리가 변해야”는 고정관념에 불과할 뿐

지난 1일 북한 김여정이 한·미 연합훈련을 두고 “북남관계의 앞길을 더욱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 될 것”이라고 한마디 던지자, 2일 통일부는 “한·미 연합훈련이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계기가 돼선 안 된다”고 선을 그었고, 3일 국가정보원장은 “한·미 훈련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5일에는 범여권 의원 74명이 “한·미 연합훈련을 연기하라”고 집단적으로 요구했다. 차기 국립외교원장 내정자는 “한·미 연합훈련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까지 얘기하더니, 6일 밤에는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한·미 연합군사훈련은 현 정세에 건설성을 결여했다”고 한술 거들었다.

이제는 중국이 한·미 연합훈련에까지 훈수를 둔다. 북한은 단기적으로 한·미 연합훈련을 저지하려 한다는 것이 명약관화해졌다. 중기적으로는 북한이 인도적 지원을 손에 넣고 일부 제재 완화를 도모하여 남북한 협력 사업을 벌이려 할 공산이 크다. 나아가 내년 대선에 북한에 유리한 정치 지형을 만들고자 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북한, 평화 말하며 비핵화 진정성 없어

2013년 4월 경북 포항시 송라면 독석리 해안에서 실시됐던 한·미 해병대의 연합 상륙 훈련. 한·미 연합훈련 축소나 취소는 북한엔 이익이 되지만 한국엔 실익이 없다. [중앙포토]

2013년 4월 경북 포항시 송라면 독석리 해안에서 실시됐던 한·미 해병대의 연합 상륙 훈련. 한·미 연합훈련 축소나 취소는 북한엔 이익이 되지만 한국엔 실익이 없다. [중앙포토]

문제는 북한이 아무런 구체적인 군사 신뢰 구축 조치 없이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흔드는데도 우리나라 당국이 알아서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 여당이 나서서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자고 하는 것을 보면 누가 누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헷갈린다. 한·미 연합훈련은 북한의 대규모 침략 가능성에 대한 준비태세를 확인하는 것인데, 마치 한·미 연합훈련이 북한을 위협하는 전쟁놀이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북한을 오래 다룬 사람들은 북한이 늘 곤궁할 때 큰소리치며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니까 모르는 척 들어주는 것도 좋다고 한다. 이번에도 쌀과 약이 필요하니 트집을 걸고 나오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뭔가를 주고 나면 언젠가 대가 있는 행동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서다. 북한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기 위한 모종의 행동을 취해줄 것이라는 말할 수 없는 약속을 믿자는 것이고, 길게는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겨냥한 남북한 정상회담에 밑자락이라도 깔자는 생각일 것이다.

남북한 간의 대화 재개가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한 새로운 여정의 출발이라면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평화를 구걸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우선, 북한은 평화를 운운하면서도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보이는 조처를 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핵과 미사일 능력은 고도화를 향해 가고 있다. 비핵화에 대한 로드맵이 없는 대화의 지속은 고작 도발 유예 정도밖에는 효과가 없다.

둘째, 북한은 이제까지도 우리 정부에 대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의 무자비한 파괴나 서해 해상의 한국민 사살에 대해 한마디 사과도 없었다. 전형적인 뭉개고 넘어가기다. 정부가 북한에 대해 사과 요구를 했다는 정황도 없다. 사과, 재발 방지, 책임자 처벌도 요구하지 않으니 북한도 어물쩍하게 넘어가는 것이다.

셋째,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북한이 도발할 것이라고 예단하면서 정보 당국이 북한 행동에 미리 멍석을 깔아주는 것도 개탄할 일이다. 북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작업을 왜 우리 정부 기관이 해야 하는지 의아하다.

북한에만 이익인 한·미 연합훈련 축소

국내의 다양한 이념적 지형과 무관하게 국민은 북한에 대해 의연하고 당당한 정부를 원한다. 북한의 이익에 앞서 한국의 국익이 지켜져야 마땅하다. 북한과의 대화에 목말라하면서 우리 대북 정책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원칙이 사라졌다.

첫째, 남북한 이익의 대칭성이다. 서로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가치에는 등가성이 있어야 한다. 북한과의 대화 재개만으로는 약속해서는 안 될 사안들이 우리 정부에서 먼저 튀어나온다. 한·미 연합훈련 축소는 북한에 이익이 되지만, 우리에겐 실익이 없다. 훈련 없는 군대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북한이 요구한다고 해도 안보 태세를 이완시키거나 동맹 연대감에 체념을 가져오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 북한은 우리의 훈련 축소에 대해 아직 어떠한 대칭적이고 등가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한·미 연합훈련을 축소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행동인지 국민도 알고 동맹 파트너도 안다.

둘째, 상호주의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 정부가 취하는 조치들에 대해 북한은 어떤 상응하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평화를 흔드는 위협·공갈·협박의 수위를 내리는 것이 대가여서는 안 된다. 위협의 본질이 바뀐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비핵화를 위한 조치는 여전히 답보 상태에 있다. 평화는 말뿐이고, 한국에 대한 안보 위협은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비핵화 없는 평화는 허울 좋은 수사에 불과하다. 북핵은 한국을 겨냥한 비수이고, 북한에는 체제 수호를 위한 보검이다. 국민을 보호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라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위해 북한의 상호주의적 행동을 끌어내야 한다.

‘북한=약자’ 프레임도 재고해 봐야

셋째, 북한을 주도적으로 전환하려는 의지도 사라지고 있다. 북한을 대하는 태도는 패배적이라는 수사가 걸맞다. 북한이 주는 시혜적 조치에 들떠 반응하고, 작은 손짓에 흔들려 김칫국부터 마신다.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에는 공감하는 사람들이 북한의 한국에 대한 적대적 정책 포기를 요구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안보와 국민 보호라는 우리의 핵심 이익은 점점 양보하면서, 말만 요란한 평화 쇼에 집착해서는 곤란하다. 북한은 안 바뀔 것이니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떨쳐버려야 한다. 북한에 한국의 원칙은 변하지 않을 것이니 자기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북한이 약자라서 한국이 도와줘야 한다는 프레임도 재고해 봐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약자일지 모르지만, 군사력에서는 결코 약자가 아니다. 경제 지원으로 군사 위협을 순화시켜 보려는 시도가 오히려 북한을 강화하고 이득만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단, 북한에 대한 퍼주기가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원이라면 아낄 이유가 없다.

대북 전략 3원칙 … 초당적 협력, 동등한 자세, 국제 공조

대북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만들고 지켜갈 필요가 있다.

첫째, 초당적 협력이다. 남북한 문제는 당파적으로, 정략적으로 접근할 이슈가 아니다. 단기적인 정권 이익보다 국가 이익이라는 장기적 관점이 중시되어야 한다. 가깝게는 국민 생명과 생활 안정 보호에 도움이 되고, 길게는 민족 화합과 통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대북 전략을 짜야 한다. 정치적 쇼나 단기적 퍼주기는 안 된다. 정파적 이익을 넘어서려면 초당적 대화 기구나 전략 기획 조직을 통해 집단 지성을 모으고 비교적 편차가 적은 공통분모에 기반을 둔 대북 전략을 실행해 나가야 한다.

둘째, 대등하고 당당한 자세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달래주기 위한 조치나 잘못도 덮어주는 지나친 아량은 북한을 점점 응석받이로 만든다. 북한이 잘못한 걸 알면서도 대화의 모멘텀 유지를 위해 그냥 넘어가면 실패를 바로잡을 기회를 상실한다. 또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면 시차가 있더라도 상응하는 대응이 돌아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대부분 뒤늦은 후회와 미련만을 남긴다. 북한에도 할 말은 하고 들어줄 수 있는 것만 들어주는 원칙과 우선순위를 정하면 자신 있는 대응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국력에 걸맞게 품격 있고 당당하게 북한을 다루어야 한다.

셋째, 남북 협력과 국제 공조의 균형이다. 북한은 늘 ‘우리 민족끼리’라는 원칙을 내세우지만, 북한과의 협력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원칙에 부합하는 형태로 진행돼야 한다. 우리 민족끼리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반도 문제가 국제사회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주변국은 물론 보다 넓은 국제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남북 관계 진전을 이루어내야 현실적이다. 한반도와 우리 민족 문제는 우리가 주도적이고 창의적으로 풀어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국제사회를 외면한 폐쇄적 민족주의는 21세기의 현실에 걸맞지 않은 좁은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