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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실리콘 밸리 선전, 개방과 통제 사이 길을 찾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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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호 26면

디지털 걸리버여행기

지난 4월 24일 중국 기술허브인 선전에서 열린 해외 귀국자들을 위한 일자리박람회. [신화=연합뉴스]

지난 4월 24일 중국 기술허브인 선전에서 열린 해외 귀국자들을 위한 일자리박람회. [신화=연합뉴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지났다. 덩샤오핑의 개혁과 개방은 중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이지만 개방을 통해 서구의 앞선 첨단 과학기술을 빠르게 흡수한 중국은 이제 규모의 경제로 세계를 선도할 꿈을 꾸게 됐다.

국가 지원으로 첨단 기술·인력 흡수 #전기차·드론 등 4차 산업혁명 선도 #자유 경쟁 신봉하는 미국의 대반격 #2018년부터 중국계 인재 귀환 봉쇄 #미·중 패권 다툼에 아시아 허브 공백 #한국, 중국 빈자리 채울 절호 기회

2015년 칭화대를 방문한 필자는 막 인쇄된 ‘중국제조 2025’ 책자를 선물로 받았다. 소프트웨어산업 부문을 집필한 칭화대 교수가 자랑스럽게 준 것이다. 돌이켜보면 2015년 당시 이 책자의 기술적 내용만 보면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글, 아마존 같은 미국 플랫폼 기업 뒤를 이어 텐센트, 알리바바 같은 중국 플랫폼 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기업과 대학, 국가 연구소가 당의 지도하에 전통적 제조업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반도체 같은 전략 분야에서도 빠르게 추격해 오는 것을 보면서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이 중국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파괴적 혁신과 자유 경쟁의 가치를 신봉하는 미국은 자국의 원천기술 연구성과를 중국이 흡수해 통제된 규모의 경제로 불려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세계 최초로 전기 버스·택시 도입

선전 중국과학원 상징물 앞에 선 판지안핑 원장과 필자(오른쪽). [차상균]

선전 중국과학원 상징물 앞에 선 판지안핑 원장과 필자(오른쪽). [차상균]

2016년 4월 나는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대명사인 광둥성의 선전(深圳)을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했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라고 하는 이 도시의 중국과학원(CAS) 선전선진기술연구원(SIAT) 초청을 받았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달리 계획된 도시 선전은 현대적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화웨이, 텐센트, 핑안보험이 선전에 본사를 둔 대표적 대기업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홍콩 과기대(HKUST)에서 창업한 드론회사 DJI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곳곳에서 자랑한다. 워런 버핏이 투자한 중국의 전기차회사 BYD도 선전에 있다. 이 BYD 때문에 선전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전기버스와 전기택시를 도입한 도시가 됐다.

SIAT는 베이징 중관촌에 있는 중국과학원 계산기술연구소 부원장이었던 판지안핑(樊建平) 박사가 선전시와 홍콩 중문대의 지원을 받아 2006년 설립했다. 그는 중국 수퍼컴퓨터 수광(曙光, Dawning)의 1세대부터 4세대까지 개발한 수퍼컴퓨터 전문가다. 판 박사는 SIAT 설립 이후 15년째 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가 바뀌어도 과학기술지도자를 바꾸지 않는 중국 시스템의 장점이다.

첫날 오전 서울대와 SIAT의 상호 관심 분야를 소개한 후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예정에 없이 판지안핑 원장이 나타났다. 실전 경험이 있는 우리 두 사람은 바로 생각이 통했다. 서로의 경험과 미래 기술 발전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후 SIAT의 안내로 화웨이와 DJI 본사를 방문했다. 당시 화웨이 휴대폰 수준은 삼성전자에 비해 떨어졌지만 화웨이는 삼성전자를 조만간 따라잡겠다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선전의 대표 기업 중 하나인 텐센트. [차상균]

선전의 대표 기업 중 하나인 텐센트. [차상균]

DJI는 HKUST 전기컴퓨터공학과 리저샹(李澤湘)의 석사 지도를 받은 프랭크 왕이 선전에서 창업했다. 선전 방문 1년 전 홍콩의 리 교수 연구실을 방문해 혁신 연구와 창업에 대해 의견을 나눈 바 있기에 DJI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DJI 현장 방문은 드론의 실제 활용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기회가 됐다.

중국 후난 출신인 그는 미국 버클리에서 전기컴퓨터공학 박사를 했다. 제어공학 분야에서 훌륭한 논문 업적을 냈지만 만족하지 못한 리 교수는 실제 드론 시스템을 만드는 실험적 연구로 방향을 바꾸었다. 2005년 학부 졸업 과제로 원격조종 헬기 제어 시스템을 만들던 프랭크 왕이 리 교수의 눈에 띄었다.

리 교수와의 만남 이후 프랭크 왕은 DJI 드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선전에 작은 사무실을 얻어 회사를 설립했다. 훌륭한 드론을 만들었지만 비즈니스 모델이 없어 한동안 고전했다. 카메라와 드론을 결합하는 상품 아이디어를 내고 드론 제어 기술을 고도화하자 DJI 드론이 세계적 혁신 상품이 됐다.

선전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SIAT에서 연락이 왔다. 중국 정부가 해외 학자와의 공동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만든 천인계획이라는 게 있다. 판지안핑 원장이 SIAT에 나를 천인계획에 참여하도록 추천했는데 동의를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선전 시청사. [차상균]

선전 시청사. [차상균]

국제학회에서 서방의 뛰어난 중국계 학자들이 천인계획 학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나는 특별한 거부감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몇 달 후 선전에 잠시 들러 달라는 요청이 왔다. 가서 보니 중앙정부 천인계획의 매칭 프로그램인 광둥성의 주장(珠江) 인재 계획의 현장 실사 회의였다. 중국어로 진행된 회의의 말미에 광둥성의 과학기술분야 책임자가 유창한 영어로 광둥성의 지원 의사를 밝혔다.

중국의 인재 유치는 중앙정부에서 큰 틀을 만들면 성과 시 단위의 지방 정부가 매칭 펀드를 만든다. 재정이 풍부한 지방 정부는 중앙 정부보다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한다. 지역 균형 발전을 추구하는 우리나라에서 새겨 봐야 하는 모델이다. 고급 인재 유치 없이 인재 육성과 지역 산업 발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 천인계획은 한국에서 내가 맡은 역할과 병행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중국 시장을 대상으로 연구해 궁극적으로 새로운 글로벌 스타트업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대에서 새로운 디지털 인재 육성의 그릇으로 설립 추진 중이던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과는 같이 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서 중국 측에 양해를 구하고 취소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이 얼마나 고급 인재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는지 알게 됐다. SIAT는 유치한 고급 인재를 활용해 선전에 부족한 인재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전이공대학을 최근에 설립했다.

한편으로는 과연 미국이 ‘미국에서 키워진 인재에 대한 중국의 공격적 영입’에 대해 가만히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2018년부터 미국의 중국에 대한 봉쇄가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패권 경쟁 희생양이 된 과학자들

선전을 개혁개방의 상징으로 만든 덩샤오핑 동상. [차상균]

선전을 개혁개방의 상징으로 만든 덩샤오핑 동상. [차상균]

2018년 12월 6일은 화웨이 CFO 멍완저우가 닷새 전 캐나다 밴쿠버공항에서 체포된 것이 긴급 뉴스로 알려진 날이다. 필자는 이날 워싱턴DC에서 개최된 한·미 민관 합동 경제포럼의 4차 산업혁명 분야 발제자로 참석하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분명했다. 한국이 미국과 함께 일본·호주·인도·베트남 등과 연대해 중국의 팽창을 억제하자고 제안했다.

멍완저우가 체포되던 날 스탠퍼드대의 장서우청 교수가 숨졌다는 뉴스가 며칠 뒤 나왔다. 노벨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그는 천인계획에 선정된 이후 중국의 관련 분야 연구를 돕고 중국계 인재들의 중국 귀환을 도왔다.

장 교수가 극단적 선택을 하기 열흘 전 미국 무역대표부는 중국의 지식재산 관련 불공정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중국 정부가 미국에 벤처캐피털을 세워 미국 벤처기업의 기술과 인재를 중국으로 빼돌려왔으며 장 교수가 2013년에 중국의 자금을 유치해 설립한 단화캐피털이 대표적 사례라고 적시했다. 이 벤처캐피털은 4000억원이 넘는 두 펀드로 113개 미국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미국은 천인계획의 수혜자인 하버드대 화학과 찰스 리버 교수를 기소했다.

뛰어난 과학자들이 미·중 디지털 패권 경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 안타깝다. 이제 과학자들도 국제 정치의 흐름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됐다.

미·중 다툼이 심화되기 전까지 글로벌 기업들은 중국을 공략하기 위해 현지에 연구소와 공장을 세웠다. 이제 미국과 중국이 갈라지면서 아시아의 허브를 어디에 둘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중국의 빈 자리를 한국이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우리가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글로벌 기업의 지역 허브를 유치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을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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