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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거리 된 원탁의 기사들…“위대해지려다 다 죽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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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영화 ‘그린 나이트’에서 모험에 나선 가웨인(데브 파텔·오른쪽)은 귀부인(알리시아 비칸데르) 등의 유혹을 받는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영화 ‘그린 나이트’에서 모험에 나선 가웨인(데브 파텔·오른쪽)은 귀부인(알리시아 비칸데르) 등의 유혹을 받는다. [사진 팝엔터테인먼트]

크리스마스이브,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타난 초록 나무 형상의 ‘녹색 기사’는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용맹한 자에게 명예와 재물을 주고 1년 후 똑같이 그의 목을 베겠다고 제안한다. 아서왕의 조카이자 무모하고 고집 센 청년 가웨인이 도전에 응한다. 그리고 1년 후 가웨인은 기사도의 명예를 지키려 녹색 기사를 찾아 나선다.

영화 ‘그린 나이트’ 오늘 개봉 #톨킨이 발굴한 중세 서사시가 원작 #미술관에 간 듯한 비주얼 돋보여 #평단 “기사도 비꼰 신랄한 판타지”

5일 개봉하는 영화 ‘그린 나이트’(감독 데이비드 로워리)는 14세기 영국의 작자 미상 서사시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가 원작. 중세 영어로 전해오던 2500행의 원작 시는 1925년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 작가 J. R. R. 톨킨이 정리해 재출간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영화는 선댄스영화제 촬영상 수상작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 디즈니 판타지 모험영화 ‘피터와 드래곤’ 등을 만든 데이비드 로워리(41) 감독이 각본·연출을 맡았다. 원작에 없는 말하는 여우, 거인족 등을 더해 어두운 유혹이 도사린 마술적 세계관 속에서 방탕한 왕족 청년 가웨인의 성장 여정을 새겼다. 아서왕이 상징하는 기독교 국가와 이교 간 대립과, 당대 추앙받던 기사도의 이면도 들췄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인도계 영국 배우 데브 파텔(31)이 주인공 가웨인 역을, ‘툼레이더’의 스웨덴 배우 알리시아 비칸데르(33)가 가웨인의 평민 연인 에셀과 가웨인을 유혹하는 귀부인 1인 2역을 맡았다. 북미에선 지난달 30일 먼저 개봉해 첫 주말 사흘간(금~일) 674만 달러(약 77억원)의 박스오피스 수입을 올렸다.

녹색 기사(사진)가 가웨인의 도끼에 목이 잘리는 장면은 편집에만 1년 가까이 걸렸다.

녹색 기사(사진)가 가웨인의 도끼에 목이 잘리는 장면은 편집에만 1년 가까이 걸렸다.

“도덕적 현실에 대한 신랄한 판타지”(롤링스톤) “마치 미술관에 간 듯한 비주얼”(HCA크리틱) 등 호평과 함께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는 신선도 90%(4일 기준)를 매겼다. 하지만 ‘카멜롯의 전설’ ‘킹 아더’ 등 기존 중세 무대 할리우드 영화들의 분명한 서사구조와 달리 상징과 은유로 낯설게 이야기를 펼친 탓일까. 일반 관객 신선도는 52%에 그쳤다. 겹겹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재미가 있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과 주연 데브 파텔,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지난달 화상 인터뷰로 만났다. 대학교 1학년 영문학 수업에서 ‘일리아드’ ‘오디세이’에 이어 ‘가웨인경과 녹색 기사’를 배웠다는 로워리 감독은 “한 젊은이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내기에 나선다는 내용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승리의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잃게 되는 게임에 응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했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

그는 “원작을 읽다 보면 굉장히 현대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크게 어렵진 않았다. 원작에 담긴 가치가 어떻게 이 시대 관객에게 울림을 줄지 탐구했다”고 각본 과정을 설명했다.

가웨인 역에 인도계 파텔을 선택한 것에 대해선 “얽매일 역사적 근거가 없어 캐스팅에 개방적이었다”며 “그전의 아서왕 소재 작품에서 볼 수 없던 기사들로 원탁을 채울 좋은 기회였다. 이야기만 좋다면 피부색은 상관없었다”고 했다(로워리 감독의 차기작 ‘피터팬과 웬디’의 팅커벨 역에도 흑인 배우를 캐스팅했다). 긍정적이고 활기찬 캐릭터를 주로 한 파텔은 각본 초고에서 구제불능으로 설정됐던 가웨인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을 불어넣었다.

기사도 정신 이면에 놓인 남성성에 대한 신화도 꼬집는다. “왜 위대해져요? 좋은 거로 부족해요?” “어리석은 남자들은 그러다 죽어요.” 신분이 높은 가웨인의 곁을 지키려고 하인 남장도 불사하는 에셀은 명예욕에 눈 먼 연인을 이렇게 꼬집으며 슬퍼한다. 로워리 감독은 “남성성 이슈는 오늘날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다”면서 “우리가 길을 잃고 간과하거나 잘못했을 수도 있는 부분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파텔은 “가웨인은 (남성이자 왕의 조카라는) 특권을 누리지만, 주변의 똑똑한 여성들 때문에 초라해진다. 덩치만 큰 아이의 모습이다”라면서 가웨인을 궁지로 모는 비칸데르의 1인 2역에 대해 “훈련받은 무용수처럼 정확했다. 억양과 신체를 바꾸는 게 놀라웠다”고 평했다.

‘그린 나이트’의 아서왕은 기존의 정의로운 영웅과 거리가 멀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 영화에서 악역을 자주 해온 영국 배우 숀 해리스가 맡아 퇴색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 연예매체 배니티페어와 인터뷰에서 로워리 감독은 “평화로웠다”고 묘사돼온 아서왕의 통치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캐릭터를) 설계했다”고 말했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앞에서 가웨인이 녹색 기사의 목을 베는 장면은 편집에만 1년 가까이 걸렸다. 영화의 독특한 환상성을 살리기 위해서다. 서사시가 원작인 영화답게 시적인 운율도 편집으로 매만졌다.

결말에선 기억과 시간에 대한 색다른 해석도 보여준다. 로워리 감독은 “산 사람이 숲에서 뼈 더미가 되는 시간은 우주적 차원에서 볼 때 단 1초 정도면 된다. 우리는 사라져 먼지가 될 것이고 머잖아 땅엔 이끼가 낀다. 이 영화에서 그런 우주적 스케일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 ‘엑스칼리버’를 촬영한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근교의 ‘위클로주’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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