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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마스크피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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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복면을 쓴 미상의 출연자가 노래를 하는 경연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이럴 때 복면은 신비주의로 다가와 관객의 기대감으로 치환된다. 공개를 전제로 의도된 얼굴 가림은 면책이다. 이와 달리 악한 의도로 안면을 가리는 행위는 비사회적 행동으로 인식된다. 서구의 경우, 얼굴 전체를 가린 것이 아닌데도 마스크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가림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견고했다. 코로나19 초기, 확산의 주요 원인이었다. 마스크는 그 사회의 역사 속에서 감염병에 대한 학습효과, 문화적 규범의 산물이다. 아시아와 달리 서양 일부 국가에서 마스크에 대한 찬반양론이 일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아시아인들은 대체적으로 얼굴 가림에 익숙하다. 조선시대 장옷이 그렇고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이 그렇다. 그러나 장옷과 부르카, 니캅, 차도르, 히잡 등 다양한 베일은 여성 억압의 상징이다.

팬데믹 건너 유토피아 전 단계 #모두 마스크 쓰는 마스크피아 #마스크 너머 불평등한 일상은 #온전히 정부의 책임이라 할만

공포의 잉태는 익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무대응이다. 백신도 없던 엄혹한 때에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은 오로지 마스크였다. 그건 틀림없다. 코와 입을 가리는 마스크의 ‘익명성’은 코로나19로 인해 ‘안전성’으로 거듭났다. “우리를 위해 마스크를 써주세요. 우리도 당신을 위해 마스크를 쓸게요”식의 캠페인은 인류의 상호의존성이 그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역설한다. 부정과 억압의 마스크는 이제 ‘함께 살자’의 상징이 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마스크는 감성 방역의 수단이기도 하다. 마스크 착용만으로 코로나19에 대한 경각심을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아가 상대에 대한 배려의 태도다. 비말을 타인에게 옮길 일도 옮겨올 일도 차단하는 효과는 기본이니 가히 마스크 찬양론을 펼쳐도 무방하다. 마치 서양식 악수의 기원과 흡사하다. 수백 년 전 잉글랜드에서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악수를 했다는 것은 확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상대를 위해할 의도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팬데믹 이후, 마스크는 공동체 일상에서의 악수가 되었다.

의학오디세이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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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는 병원을 찾는 여성 환자들의 화장에 대한 부담도 덜어주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나서는 이구동성으로 외출 시 화장에 대한 의무감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환자가 늘고 있다. 팬데믹 이후 화장 트렌드는 베일을 착용하는 중동 여성처럼 눈 화장 중심으로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는 연구조사 결과도 있다. 마스크는 인류의 욕망마저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마스크를 모든 시민이 너 나 할 것 없이 쓰고 있는 것은 지극히 평등하다. 그러나 마스크 너머 시민의 일상도 평등하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국민에게 주어지는 재난지원금만으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인지는 그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목표하는 평등은 물질적 조건의 평등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적·도덕적 조건의 평등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에겐 마스크는 불편함의 전부이지만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겐 생존의 억압임을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4차 대유행을 막아서는 힘은 반듯한 마스크 착용이며 온전한 거리 두기, 그리고 백신 접종뿐이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팬데믹의 강을 건너 서로의 체온이 따뜻한 유토피아를 가기 위한 전 단계, ‘마스크피아’에 극성스럽게 천착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신 접종 선진국들도 다시 마스크를 쓰고 있다.

늘 그랬듯이 우리 시민의 능동적 참여는 충족될 것이다. 그러나 마스크 너머 불평등한 시민의 일상은 온전히 정부의 책임이다. 통제가 길어지면 축축한 그늘이 드리운다. 채 살피지 못한 사람들의 움츠러든 마음에 햇살이 깃들도록 하는 일, 그건 재난지원금의 비율과 액수가 아닌 국민 일상에 대한 정부의 진정성이다. 여기엔 여야가 따로 없다. 있어서도 안된다.

답답한 마스크를 쓴 채 속절없이 여름을 지나간다. 찜통더위에 마스크를 낀 것만으로 올여름은 충분히 잔혹하다. 여름의 향기가 분명한 아카시아에 대한 기억도 이젠 가물거린다. 모든 것들의 관계를 막아서는 몹쓸 감염병, 이 혼돈의 시대는 다시 모든 것들의 유실의 시간들이다. 마스크 너머 사람들, 공감의 눈빛만이 유일한 위안이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무방비의 결과들이 길어지면서 때론 그 눈빛들이 서글프다. 작금의 위기를 넘어서기엔 여전히 인류의 힘은 모자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끝내 그 답을 찾을 것이다. 나만을 위해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