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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 딴 ‘순이’, 한국계 아니라고? 中소수민족 출신, 美체조스타 됐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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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사 리 미국 국가대표 선수가 평균대 연기. 본인이 "기억하고픈 사진"이며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Instagram]

수니사 리 미국 국가대표 선수가 평균대 연기. 본인이 "기억하고픈 사진"이며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Instagram]

미국 여성 체조팀에 ‘순이’가 있다? 절반은 맞는 얘기다. ‘수니(Suni)’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수니사 리(Sunisa Lee) 선수가 있어서다. 이름만 봐선 한국계일 것도 같지만, 그는 중국 소수민족의 뿌리를 가진 미국 토박이다.

만 18살인 그는 미국 체조팀의 보물로, 29일 저녁 열리는 도쿄올림픽 여자 체조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체조의 살아있는 전설인 시몬 바일스가 급작스럽게 기권한 뒤 새로운 버팀목으로 역할을 해내고 있다. “미국 체조팀에 남은 최고의 희망”(워싱턴포스트) “바일스의 빈자리를 채워준 빛나는 보석같은 선수”(뉴욕타임스) 같은 평가가 쏟아지는 중이다.

대 선배 격인 시몬 바일스(왼쪽) 선수가 지난 22일 수니사 리 선수를 격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대 선배 격인 시몬 바일스(왼쪽) 선수가 지난 22일 수니사 리 선수를 격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체조 천재소녀 뒤엔 소수민족의 끈질긴 저항 DNA

“좋아하는 과목은 과학, 취미는 낚시, 감명 깊게 본 영화는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

미국 국가대표팀 팀USA의 공식 선수 소개 프로필에 그가 해놓은 자기 소개의 일부다. 해맑은 소녀인 그의 부모는 중국 소수민족인 흐멍(Hmong) 족(族)의 후예다. 수니 리가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 주(州)의 소도시 세인트 폴에서 태어난 배경엔 소수민족의 아픈 역사가 있다.

흐멍족은 몽족, 또는 묘족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 남부에 살던 소수민족으로, 이들 중 일부가 18세기 후반부터 베트남 및 라오스 등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중국 봉건 군주에 복속되지 않으려는 저항심 때문이었다는 게 학계 정설이다.

묘족으로도 알려진 흐멍족의 전통무용. 모심는 동작을 재연한 모내기춤이다. [중앙포토]

묘족으로도 알려진 흐멍족의 전통무용. 모심는 동작을 재연한 모내기춤이다. [중앙포토]

흐멍 족의 피엔 저항심이 흐른다. 동남아 전문가인 김이재 경인교대 교수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동남아엔 ‘지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있는데 미국 인류학자 제임스 스캇은 이들을 ‘조미아(Zomia)’, 즉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자’라고 불렀다”라며 “흐멍족은 그런 이들을 대표하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이들 일부는 20세기 후반 베트남전 등 현대사의 굴곡 사이에서 미군에 협력하며 생존을 도모하다 난민이 됐는데, 이들 다수를 미국이 이민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김이재 교수는 “미국이 흐멍족 난민들에 책임감을 느끼고 많이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정계에도 흐멍족 출신이 다수 진출했는데, 2018년 치러진 상하원 중간선거에서 당선한 인물만도 11명이다. 예술계와 스포츠계에도 다수 인물이 활동 중이며, 그 중 대표주자가 수니사 리 선수다.

단체전 은메달을 목에 걸고 환호하는 미국 여자 체조팀. 맨 오른쪽이 수니사 리 선수다. 로이터=연합뉴스

단체전 은메달을 목에 걸고 환호하는 미국 여자 체조팀. 맨 오른쪽이 수니사 리 선수다. 로이터=연합뉴스

리 선수가 체조를 처음 접한 건 2009년, 만 6세 때였다. 그의 재능에 더해 흐멍족 특유의 DNA가 프로 선수로서 여정을 다지는데 도움이 됐다는 게 다수 영미권 매체들의 분석이다. 올림픽 선발전 직전엔 아버지가 일을 하다 부상을 입고 가슴 아래 전체가 마비되는 불운을 겪었고, 리 선수 본인도 발목 부상을 이겨냈다. 타임지는 28일(현지시간) “흐멍족 특유의 끈질긴 DNA와, 자신을 뜨겁게 응원하는 흐멍족의 에너지 덕에 수니사 선수는 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풀이했다.

리 선수의 코치 역시 흐멍족인데, 그는 타임지에 “수니도 부모님도 너무 열심히 훈련만 하려고 해서 ‘조금은 놀기도 해야 한다’고 내가 말해야 할 정도”라며 “우리 흐멍족의 이런 마음이 수니에게 압박감이 아닌 응원으로 느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 소수민족 출신으로 동남아를 거쳐 미국 중부에 정착한 흐멍족이 하나되어 수니사를 응원하고 있는 셈이다.

수니사 리의 주종목은 평행봉이다. 지난 27일 단체전에서의 연기. AP=연합뉴스

수니사 리의 주종목은 평행봉이다. 지난 27일 단체전에서의 연기. AP=연합뉴스

수니사의 강점 중 하나는 강한 멘탈이다. 그는 팀USA 공식 블로그에 “그냥 재미있어서, 공중제비 도는 게 즐거워서 체조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인 세인트폴의 지역 방송국 MPR 뉴스는 2017년, 수니사 선수를 소개하면서 “얼마나 집중력이 뛰어난지, 훈련 중엔 누가 옆을 지나가도 모를 정도”라며 “아직은 기술력이 완벽하진 않지만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눈부시게 빠른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약 4년 뒤인 2021년 7월29일, 수니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가 되어 성조기를 달고 메달 사냥에 나섰고, 세계 1위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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